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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후손의 가슴 아리도록 슬픈이야기

독립운동 사회주의계열 후손들 <김남천 옹과 정종래 씨>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7.15 14:29
  • 수정 2019.08.0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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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국보훈을 이야기하면서 소안도의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의 험난한 역사와 궤를 같이 해 가족이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하였지만 빛나는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 후 이념대립이 격화되면서 대부분 좌익계열이었던 소안도의 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들, 후손들에게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1950년 정부는 “북한에 동조할 위험이 있는 이들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다. 이때 소안도 사람 중 270여 명이 바다에 던져져 지금 그 후손들은 6·25 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를 매년 모시고 있다.이 소안도의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 이야기를 2007년 8월 14일자 뉴스메이커 737호는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이야기지만 당시 그들의 이야기 또한 호국보훈과 관련한 역사이며, 우리의 과제를 상기시키고 있는 바 잠시 지금도 생생한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보려고 한다.  

 1950~60대의 독립운동가 2, 3세들은 박정희정권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한창 청년시절을 보낼 때였다고 한다. 당시 뉴스메이커와 나온 할아버지·아버지가 좌익계열 운동가였던 정종래 씨(우측 사진)는 “세상은 저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닌 빨갱이의 후손으로 보았다”고 회상했다.

 급기야 후손들은 부친이나 조부의 독립운동 자료를 없애기 시작했다. 당시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의 한 관계자는 “작은 종잇조각 하나도 소각했다”고 회상했다. 일부는 자녀들에게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고 아예 섬을 떠나기도 했다고.좌익계열 독립운동가를 부모로 둔 이들은, 자녀들의 ‘앞길’이 이미 막혔다는 생각에 교육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항일독립운동의 명예는 ‘사상의 그늘’ 밑에 멍에가 되었다. 그 멍에에 매어 사람들은 불망(不忘)해야 할 것을 망각한 채로 살아야 했다. 그 억눌린 망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가 두어 차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시국의 거센 파고 속에서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세월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마을 입구에 떡 하니 들어선 그 기념탑을 보는 사람들의 소회는 어떠했을까. 그것도 순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세운 그 ‘기념적인’ 기념탑을 보면서. 그러나 그것으로서 모든 아쉬움이 풀린 게 아니었다. 그동안 ‘사상문제’ 때문에 누구까지 기념해야 하는가를 놓고 말도 많았고, 공적의 순서를 따지느라 보이지 않는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기념탑이 세워진 자리가 문제였다. 항상 소안항일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소안사립학교 터가 당연히 그 탑이 들어서야 마땅할 자리였음에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컸단다. 
 

뉴스메이커는 소안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1990년 12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된 김남두의 동생 당시 84세의 김남천 옹(좌측 사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1988년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을 때 간사를 맡았다. 비록 터울이 지기는 하지만 형에게서 항일운동 관련 사실들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고, 기억력도 명료해 당시의 상황을 고증하는 데 누구보다 큰 몫을 했다. ‘당사도등대 습격사건’의 현장을 7차에 걸쳐 답사, 그곳에 항일전적비를 세우고 사실을 정리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뉴스메이커 기사에 따르면 그는 보청기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연로하였지만, 항일운동에 관한 기억만큼은 또렷이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항일운동에 직접 가담키 어려운 어린 나이였던 그는, 형의 밑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는 듯했다고. 그러한 어려움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인지라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2005년 3월 1일 건국포장이 수여된 정창남의 손자 당시 55세의 정종래 씨의 이야기도 나온다. 정 씨는 누구보다도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주도적으로 활동한 관계로 소안항일운동 관련 서훈자 중 제일 늦게야 서훈을 받을 수 있었고,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를 따라 잠시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한 전력이 있어 독립유공자 가족으로서 자랑은커녕 항상 쉬쉬하며 숨죽은 듯이 살아야만 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좌익계열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고2 때 알았다고. 그 사실을 알고부터 그는 사관학교에 진학하려던 꿈을 접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술과 담배를 하고, 가출도 해보고 숱하게 죽을 생각까지도 해봤다. 군대를 마친 후 작은 회사에서 잡무를 보다가 박정희가 죽은 후 연좌제가 폐지됐다는 말에 공무원시험을 쳤다. 우여곡절 끝에 1980년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그는 뉴스메이커 보도 당시 소안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2005년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서훈을 받을 때, 그의 할아버지도 서훈을 받았다. 그는 할아버지의 공로내용을 여러 장 복사해 사촌과 그 조카들에게 돌렸다. 훈장은 자신의 집 응접실에 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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