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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저우 운안구 정부와 교류협력 · 자매결연도 관계에 달렸다

[기획] 진린의 고향 광저우를 가다 2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7.16 14:19
  • 수정 2019.07.1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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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저우 운부시 운안구 동방시대 광장 앞에서 열린 ‘대한민국 완도 수산물 해외시작 개척 상품 설명회’는 중국 광동진씨 종친회가 거의 떠맡았고, 문제가 되는 건 완도특산물을 먹는 방법, 즉 요리방법에 관한 설명을 해주는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한국 완도의 상품이다보니 어떻게 먹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먹는 방법을 알려주니 곧 그곳 사람들도 먹는게 익숙해졌다. 

 이날 광동진씨 종친회장까지 직접 나와 완도 수산물 수출 설명회를 같이 했다. “낮에는 자기 일들을 해야 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없다”며 종친회장은 저녁 시간대 직접 자신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온 상황이었다. 진 회장의 말마따나 저녁시간이 되자 제법 사람들이 많이 동방시대 광장 앞으로 모여 들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수출 설명회를 했던 동방시대 광장 앞 제법 규모가 큰 쇼핑몰 건물이 광동진씨 종친회 소유였다. 설명회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모두 진현모 광동진씨 해남 추진위원장 덕이었다. 바로 혈족으로 맺어진 ‘꽌시’ 때문이었다.  더구나 광동진씨 종친회 영향력은 완도군이 교류협력을 강화해 자매결연을 맺고자 하는 운안구 정부에도 미치고 있어 그들과의 꽌시를 어떻게 가져가느냐가 완도군이 문화교류든, 경제교류든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임에 틀림없었다.

진린장군 사당에 진현모 광동진씨 해남 추진위원장이 절을 하고있다.


 꽌시는 삼국지와 같은 중국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의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받은게 있으면 갚아야 하고, 한번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에게는 공과사를 불문하고 끝까지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본인의 체면에 관계된 것이며, 이런 일을 무시하면 체면이 손상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런 봉건사회의 미덕이 부패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에 때문에, 꽌시라는 말은 부정적인 어감이 강해졌다. 꽌시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중국인은 대중에게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지만 자신과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는 예의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인간관계가 철저히 나와 가족 그리고 아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거(큰형님)’라는 호칭이 많이 등장하는데 일반적인 중국인 사이에서는 그렇게 많이 쓰지 않는 표현이고 일반인들은 보통 ‘거거(형)’라는 표현을 쓴다.중국에서의 친구란 나이가 거의 같으면서 친밀하게 오래 사귄 사람이 아니라 사회생활 중에 만나서 알게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꽌시에 따라 단계가 있어서 친구라고 불린다고 남이 아닌 게 아니다. 친구를 부를 때의 호칭도 다 따로 있다

 신펑요우는 남, 심지어 적과도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단계로서 단순히 새로 알게 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냥 지나가다 이름만 알고 얼굴만 안 사람들도 친구라 부르는 것. 경쟁자나 적으로 출발할 게 뻔해도 처음 알면 신펑요우다.  

 하오펑요우는 좀 신펑요우에서 진전되어, 주고 받는 우호적인 단계에 이른 친구를 말한다. 
라오펑요우는 친구 관계의 정점으로 자신의 주변 사람들까지 소개시키고 꽌시를 맺게 하는 단계로서 여간한 물건을 허락받지 않고 써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둥 일반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이다.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 사이에서 꽌시를 맺었다고 하면 최소한 이 수준의 관계를 유지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최종적인 단계는 시옹디 즉, 형제 관계의 꽌시로서 친구를 넘어서 가족, 한 몸처럼 여기는 단계이다. 당연히 서로 한 몸이나 다름이 없으니 사기나 배신 등은 이 단계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단계에서는 약간 더 나아가면 아예 서로 가족을 책임지겠다고 하거나 서로의 가족끼리 가족을 맺기도 한다.

 진현모 위원장은 바로 광동진씨 종친회장과 시옹디였다. 피로 연결된 혈족이기에 광동진씨 종친회는 그를 진정한 형제로 여긴 것이다. 그 덕에 완도군 문화·경제 교류사절단은 꽤 큰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그날 밤 광동진씨 종친회는 완도군 교류사절단을 초청해 끈끈한 유대의 시간을 가졌다.  

정석호 완도부군수가 간담회 후 운안구 정부로부터 옥을 선물 받았다.


 다음날인 6월 19일엔 광저우 운부시 운안구 정부회의실에서 양 도시간 문화·경제 교류 협의 간담회가 진행됐는데, 그 내용보다 먼저 광저우 운부시 운안구 정부가 진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두 도시간 꽤 중요한 지점인데 그들의 생각을 진린장군 사당에서 그들의 역사를 설명하는 이연희 운안구 정부 관광개발국장의 설명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만력 3대정은 명나라 신종 만력제 시기에 있었던 3번의 큰 전쟁을 말하는데 몽골 지역에서 일어났던 보바이의 난(1592), 조선에서 있었던 임진왜란(1592~1598), 묘족 반란 중 가장 컸던 양응룡의 반란(1597~1600)이 그것이다. 특히 양응룡의 반란 사건은 영화 동방불패의 배경으로 쓰이기도 했다. 만력 3대정은 장거정의 개혁으로 간신히 유지되던 명나라가 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진린의 고향 광저우에서는 만력3대정 가운데 임진왜란과 양응룡의 난 2개의 큰 전쟁에 참전한 장군으로 진린이 유명했다. 임진왜란 참전은 워낙 우리가 관계가 깊으니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양응룡의 난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야 겠다.  

 양응룡의 가문은 당나라 이후 대대로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아 파주를 다스렸는데, 파주는 사천, 귀주, 호북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지형이 험준한 산악지역이었다. 만력 초기에 양응룡은 파주선위사사에 오른 후 사실상의 독립세력을 형성했으며, 마침내 만력 25년(1597년) 반란을 일으켰다. 명 조정에서는 양응룡의 반란 초기에 방침을 분명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다. 양응룡은 명나라에 뇌물을 바쳐 자신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다른 묘족을 회유하여 사천, 귀주, 호광 등의 요새 수십 곳을 공격하게 하였다. 만력 26년 사천순무 담희사가 양응룡의 공격을 한차례 방어하였고, 만력 27년 귀주순무 강동지가 반란을 진압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명 조정은 강동지를 파면하고 이화룡을 병부시랑에 임명하여 반란의 진압을 총괄하게 하였다. 만력 28년(1600년) 2월, 총독 이화룡의 지휘 아래 명나라의 대군이 진격을 시작하였다. 4월, 유정이 이끄는 군대가 양응룡의 부대를 격파하고 양응룡의 본거지를 포위하였다. 6월, 성이 함락되자 양응룡은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알고 자살하였으며 그의 아들은 포로로 잡혔다. 이후 명은 파주를 준의와 평월로 나누고 각각 사천과 귀주에 귀속시켰다.

 이때 진린은 명에 돌아가서는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도독동지, 지휘첨사에 임명되고 광동백에 봉해졌으며, 1년 전인 1597년에 양응룡이 파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1598년에 호광 총병관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어서 피림을 토벌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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