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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진린도독비 세미나 · 청소년교류, 중국과우호협력 마중물 기대

[기획] 진린의 고향 광저우를 가다 3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7.19 10:24
  • 수정 2019.07.1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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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호 완도부군수가 교류협력 사절단과 함꼐 간담회 후 운안구 정부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진린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조선을 구원하러 온 것은 정명가도라는 일본, 왜의 침략의 명분이 명나라의 도움으로 재조지은으로 바뀐 것이다.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으니 그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탄보비까지 완도에 세우며 조선은 중국에 대한 고마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재조지은, 재탄생 논리의 중심에는 완도가 있다. 진린의 도움은 완도에서만 있었기 때문이다. 진린의 전쟁 5개월의 여정은 완도에서만 이루어졌다. 다른 곳에서는 일체 활동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조선에 참전을 결정한 것은 순망치한으로 말할 수 있다. 곧 조선이 일본에 망하면 다음 차례가 명나라인데 전쟁이 중국으로 번지는 것보다 조선에서 끝나기를 바란 것이고 척계광의 왜구와의 전쟁에서 얻은 교훈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63년경 명나라는 왜구와의 전쟁으로 엄청난 국력의 낭비를 겪은 바 있었다.

 완도 고금도에서 진린 장군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수군사령부를 만들어 이순신과 함께 왜구를 무찌른 대역사를 하였고 고금도에 관왕묘를 만들어 전쟁의 승리와 평화를 기원한 장소가 바로 완도다. 완도는 진린 장군이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출발지다. 13척의 배로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였다고 하지만, 그 이후 진린 장군의 도움이 없었으면 세력균형이 또 달라질 수 있는 위기의 상황이었다. 진린은 명나라를 위하여 조선에서 전쟁을 끝내려 완도 고금도에 수군기지를 설치하고 일본 침략자들을 격퇴했다.

 진린장군과 이순신장군의 연합작전으로 일본 왜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물러간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풍신수길이 죽고 일본의 내부사정이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순신과 진린의 강력한 수군의 위세에 더 이상 침략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진린장군은 수군 5천명을 이끌고 7월 16일 완도 고금도에 이르러 이순신의 수군과 연합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일본은 더 이상 침략행위를 지속하거나 군수물자나 식량을 보급을 할 수 있는 해상로를 유지 보존할 수 없어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게 됐다. 바로 진린 덕분이다고 할 수 있다.

지난 6월 20일 정석호 부군수를 단장으로 한 완도군 교류 사절단이 중국 광저우 운부시의 진린장군 사당을 방문해 운안구 정부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진린장군 모습 옆에 이순신 장군의 모습도 보인다.


 진린장군은 사비를 들여 관왕묘를 세웠으며, 명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사재를 털어 고금도 주민들에게 주면서 관왕묘에 제향을 부탁하고, 주민들에게 사례까지 하였다. 참으로 은덕을 베풀었다. 

 또한 이순신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이순신의 아들에게 금 수백냥을 부조하고 떠나기도 하여 이순신의 죽음을 정말 애통해 하였다. 그래서 그에 대한 진린도독비가 완도 청산도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1798년 ‘이충무공전서’에 나와 있다. 진린 장군이 이순신을 그리워하면서 세운 비다.

 비석에 세워져 있고 비문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밝혀졌고 청산도라는 것도 밝혀졌으나 그 정확한 위치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병력 5,000명과 병선 500여척을 몰고 조선을 도우려고 온 진린장군이 고금도에만 그 병력을 한 군데에 배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청산도 상산포에도 분산배치하여 청산도에서 병사들이 배를 수리하고 휴식을 취하며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농사도 지었을 것이다. 청산도 구들장논도 그 유래를 따져보면 광동성에서 관개수리시설과 녹화사업을 했던 진린이라고 생각하면 진린의 뜻이 반영된 유산일 수도 있다고 본다. 청산도 그 자체로서도 역사적 장소이다.  

 특히나 청산도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었던 세계농업유산인 구들장논과 더불어 대한민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슬로우시티와 더불어 역사적 문화자원은 새로운 활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시장(市場)으로서 중국을 겨냥한다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작업니다. 제주도의 서복기념관처럼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찾아올 명분을 주고 또한 내국인에게도 새로운 역사의 평가를 통해 우리의 가치와 철학을 재구성하는 테마섬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인류보편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 더욱 빛난다.

 왜구의 배 500척 이상을 격침시키는 대전공을 세웠음에도 1599년 2월 선조를 만나 그 공을 “이순신”에게 돌리는 겸손함을 내보이고 있다. 이에 선조가 ‘진린은 명장인가?’ 하고 물으니 이항복은 ‘명장입니다’라고 대답한 근거가 바로 완도 고금도에서 내보인 진린 장군의 업적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진린의 업적으로 인하여 완도 고금도는 한중동맹을 상징하는 공간이고 완도 청산도는 한중우호를 상징하는 섬이다. 이러한 고금도와 청산도가 완도에 있어 완도는 대한민국 어느 곳보다도 역사적 가치와 위상을 드높이고 있으며 한중이 힘을 합쳐 그 보편적 가치를 오늘에 되살려 나가야 하는 실마리가 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완도는 진린 장군으로 인해 더욱 빛나고 있다. 그 열매가 맺어지는 날까지 힘을 합쳐야 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대두되고 있다.
오는 9월 23일부터 9월 26일 사이에 중국 광저우 운부시 운안구 정부 관계자와 중국방송, 광동진씨 종친회 등이 완도를 방문할 예정이다. 진린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 제작과 중국 청산도 진린도독비 현장을 찾기 위한 방문이다. 지난번 6월 방문한 완도군 경제·문화 교류협력 사절단이 간담회에서 제기한 내용을 확인하러 오는 것이다. 완도로서는 진린장군에 대한 역사적 헤게모니(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러기 위해선 완도군도 준비를 해야 한다. 우선 이충무공 전서에 기록된 진린도독비와 관련한 학술세미나를 열어 중국 운안구 정부 관계자들에게 그 기록과 관련된 신뢰를 만들어 줘야 한다. 특히 국내 이순신 전문가인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를 꼭 참석시켜야 한다. 역사기록은 호남일지라도 이순신 기념사업 및 연구와 관련한 주도권은 영남이 가지고 있기에 그를 꼭 데리고 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중국 운안구 정부 관계자들이 오는 9월 무렵 완도군청 문화체육과에서 학술세미나 준비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돼 절묘한 타이밍이 될 것으로 보인다. 완도군이 청산도에 학술세미나 자리를 마련한다면 금상첨화이지 않을까.

 완도군이 헤게모니를 잡아갈 또 하나는 청소년 교류사업을 공동으로 운안구 정부와 진행하는 것이다. 이미 운안구 정부는 지난 6월 교류협력 간담회 때 청소년 교류사업에 긍정적인 검토와 반응을 나타냈고, 완도군 교류협력 사절단이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완도군의 장보고 해외탐방 사례를 물으며 청소년 교류사업 추진을 다그치기도 했다. 

 완도가 한중우호의 잠재적이며 국제적인 문화관광 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청산도 진린도독비 학술세미나와 청소년교류사업을 꼭 진행해야 한다. 고금도 이순신 성역화 사업과 끝나고 청산도에 진린도독비가 건립된다면 앞선 2개의 사업은 완도 국제 문화관광 도시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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