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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들에 무성한 것들이여

[완도 시론] 정택진 /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8.30 12:03
  • 수정 2019.09.0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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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진 / 소설가

둘러보면 몹시도 우거진 들이며 산이다. 우거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녹음으로 찢어질 듯 싶다. 길을 벗어나면 한 발 내어 디딜 곳도 없다. 지금쯤은 벼가 자라고 고구마순이 넝쿨져 있어야 하지만, 산 가까운 밭은 칡넝쿨이 점령했고, 저기 무살논들은 갈대로 무더기졌다. 나무를 해 때고 꼴을 베느라 산이고 들이고 빗자루로 쓴 듯 했던 때를 생각하면,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다. 그 단정하던 산천이 이리도 무질서하게 바뀌는 게 한 세대면 족하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저 무성한 것들은 중정도 짐작도 없는 것이라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도 산소라고 봐 줄 것이 아닌즉, 내 없어지고 몇 해 안 지나면 저것들에게 점령당할 것을 생각하니, 예초기의 날이 쌩쌩 돌고 있는데도 바라보는 내 정신은 멍하기만 하다.

이 밭의 저 구석에서 가을이면 동생과 나는 고구마순으로 집을 지었다. 저쪽에다가는 솔방울과 자장개비로 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웠고, 그것을 먹은 우리의 입서리는 닭똥구멍이 되었으며, 동생과 나는 서로의 얼굴에 킬킬대다 배꼽을 쥔 채 고구마순 집으로 몸을 던졌다. 우리는 고구마순 담당이었으므로 순이 쳐진 두둑을 할머니와 엄니가 고구마를 캐며 따라오면, 우리는 얼른 달려가 고구마순을 쳤고, 그러고는 또 자장개비를 주으러 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우리가 집을 짓고 불을 피웠던 자리에는 조부모와 아버지의 뫼뚱이 자리잡았다. 잡초와 잡목만 무성해진 것이 아니라, 그때는 없던 인간의 자리도 늘어나 있는 것이다. 시간은 삶의 것들을 소멸로 가져다 놓는다. 물론 그 역도 사실로서 성립한다.

그때 삶의 세계에 있던 사람들은 ‘놈 부끄러워’ 전답을 안 묵혔고, 전답이 어지러우면 놈 부끄러울 것 같아 부지런히 지심을 맸다. 선산은 더더욱 ‘놈 부끄러우면’ 안되는 것이었다. 어떤 어른은 부모의 산소에서 살다시피 했고, 그리고 일년에도 너덧 번씩 풀을 깎았다. 그 얼마 전에는 산소 옆에 초막을 지어놓고 삼 년을 산 분들도 있다 하지 않은가. 그런 태도들에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 산과 들이 오늘의 모양새이듯, 그것은 또 그 시대의 모양새였다.

아직까지는 ‘놈 부끄러워’ 벌초를 하는 마음들이 많다. 자기가 못하면 사람을 사서라도 한다. 그것이 우리가 선대로부터 받은 마음이다. 세월이 더 흐르면 이제 ‘놈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들로 세상은 채워질 것이고, 그러면 이 산소도 칡과 악새로 덮일 것이고, 아마 그때쯤이면 예초기를 들고 풀을 깎는 모습이 외려 ‘놈 부끄러운’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십 년 남짓한 세월이 저 들과 산을 이렇게 바꾸었듯, ‘놈 부끄러울 것 없는’ 것들이 자연스런 모습이 되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으리라.

산 자는 죽어보지 못했으니 죽음을 모르고, 죽은 자는 또 죽었으니 죽음을 모른다고 한다. 그러니 죽음은 없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실상을 모른다는 것이지, 죽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것은 아니리라. ‘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으매 나는 저히고’라 했던 ‘월명사’나,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다들 죽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동물도 죽음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인간 누가 죽음과 소멸에 대해 생각 안해본 사람이 있겠는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그 절대적 운명을 말이다.

저기 누운 자가 있어 내가 여기 예초기를 매고 섰고, 내가 있어 또 내 자식이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런 운명적 관계는 변할 수 없다. 내가 ‘놈이 부끄러워’ 뫼뚱의 풀을 깎든, 부모에 대한 도리로 그것을 하든, 그것은 내 몸에 묻어 있는 정신이다. 그 정신이 없다면, 인간이라고 하는 이런 존재가, 저기 잘리는 들풀 한 모숨, 저기 베어지는 잡목 한 그루 이상이 될 수 있겠는가. 내려온 것들을 물려받고, 거기에 그 시대의 문화를 보태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한 해를 살고 사위는 저 악새들과 다른 인간만의 특징이리라.

기억에서 잊혀질 때 비로소 그 존재는 이 세상 것이 아니게 된다. 물리적 소멸은 가시적이어서 일시적이지만, 뒤에 이어지는 기억적 소멸은 한 존재를 영원히 지우는 일이 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존재가 이 세상에 의지할 데라고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저 존재들을 존재하게 하기 위해 풀을 벨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배운 세상의 질서이며 정신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가 배운 질서 안에서 살다가게 마련 아니겠는가. 지상의 기억에서 지워질 때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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