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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도의 불매운동

[독자 기고] 마광남 / 향토사학자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8.30 12:09
  • 수정 2019.08.30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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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남 / 향토사학자

왜구(倭寇)들이 또다시 우리를 침략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 피를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새삼 이 속담이 생각난다. 일본의 침략을 말하면 임진왜란이 떠오르는데, 왜(倭)가 우리나라를 침범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다.(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一 赫居世 居西干)

삼국사기에는 “八年倭人行兵欲犯邊聞始祖有神德乃還(8년왜인행병욕범변문시조유신덕내환) -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왕에게 신덕(神德)이 있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기원 전 50년)를 시작으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714회를 침범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번이 715회째다.

우리는 일본을 바로보아야 한다. 국사가 선택과목인 때가 있었다. 자국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는데 교육에서부터 그러지를 못했다. 자기의 역사를 모르고서 무엇을 바르게 하겠는가? 역사는 필수가 되어야 하고 초등에서 대학까지 이어져야 한다.

우리국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스로 나서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하고 있다. 이번 기회를 활용하여 제품 개발기술과 제조기술 비롯한 모든 면에서 일본을 앞서야 한다. 일본과 아베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한국이 일본보다 앞서는 것이리라. 

일본인들은 지금과 같은 일을 1920년에도 했었다. 당시 완도에서는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하여 우리 물건을 배제하고 자기들의 물건만을 팔면서도 다른 지역보다 엉뚱하게 비싸게 팔았다고 한다. 이러한 행태를 참지 못한 김영현(金榮炫,38), 김태현(金台鉉), 이승호(李昇浩), 이재철(李在喆) 등은 1920년 완도청년회의에서 “완도는 완도인의 완도인데 다른 사람의 지배나 명령을 받지 않고 교육과 경제개선을 꾀하자”고 역설을 하였다. 또한 완도는 타군에 비해 물가가 너무 비싸고 우리물건을 팔지 못하고 있음에 분개하여 소비조합(일명 購買組合)을 만들자고 호소하였고, 소비조합에서는 물건을 저가로 공급하고 이익을 배당하자고 청년들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리고 1주당 2원을 출자하는 단체를 만들기로 합의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의 인가를 발을 수가 없었다. 대안으로 소비조합대신 개인잡화상운영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출연자 35명이 280원을 모아 1920년 9월 1일에 “완도상회”라는 상호로 문을 열었던 것이다.

그동안의 횡포에 쌓인 응어리가 되어 폭발적인 인기로 나타났고, 소비자들이 완도상회로 몰리면서 일본인들의 상회는 파리만 날리는 가게가 되고 말았다.

일본경찰과 검찰은 일본상품 불매운동이라는 말을 차마 쓸 수가 없었던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엉뚱한 죄명으로 김영현을 구속했다.

김영현은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고 다른 사람은 무죄라고 주장하면서 끝내 혼자서 죄를 뒤집어쓰고 장흥지원에서 징역3월을 선고받았다. 1심에 불복하여 대구복심법원에 상소하였는데 1921년 1월 25일 무죄선고를 받고 출옥하였다. 이 사건을 완도에서는 소비조합사건이라고 한다.

김영현이 무죄를 선고받았던 것은 미리 준비한 일본제품을 법정에 가지고 가서, 우리는 일본제품을 사다가 팔았는데 그것이 왜 죄가 되느냐는 항의 한 마디에 무죄를 선고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완도는 어느 지역보다 앞장서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했던 자랑스런 고장이다. 강직한 완도인들을 오늘 다시 환기하면서, 조상들의 정신을 기리고 슬기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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