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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마 “언론, 약자 대변해야 해” … 29살 완도신문, 자기혁신 필요하다

[데스크 칼럼] <고 이용마 기자와 언론개혁 그리고 완도신문>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9.06 10:32
  • 수정 2019.09.0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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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신문과 씨름하다 주말을 이용해 늦은 여름휴가를 8월말 떠나려는 찰나 페이스북을 통해 새벽시간 이용마 기자의 부고를 접하게 됐다. 동시대를 살며 지역신문 기자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심장이 정상적으로 뛰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먹먹함이 먼저 다가왔다. 그는 마지막까지 웃으며 이승에 살아 있는 우리를 전송했다.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거대한 세상에 부딪혀 깨져본 사람들이 어쩌면 화석시대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이용마. 그는 해직기자로서 MBC 공영방송 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정권의 공영방송 사유화에 반발해 한국 언론사상 가장 긴 노조파업을 이끈 것이 그를 언론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가 왜 싸웠는지, 왜, 어떻게 언론개혁을 해야 하는지 더욱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중앙과 지방에서 언론구조는 별반 다르지 않고 정도와 규모의 차이라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2015년 이용마 기자는 한 인터뷰에서 “(정권이) 검찰과 언론, 딱 두 개만 독립을 시키면 대한민국 정치가 정말 발전할 거에요”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공영방송을 국민 손에 돌려줘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그래야 언론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쌍둥이 두 아들 현재와 경재에게 쓴 자서전적 책인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MBC뉴스 이용마입니다에서 이용마 기자가 바라보는 언론개혁은 단호했했다. 그는 “언론이 바로 서는 것은 단순히 정치권력의 문제를 떠나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관련해 더 큰 의미를 갖는다”며 “언론이 정치권력·언론사 사주·재벌 등 누군가에 의해 통제된다면 사회적 의제는 정치권력이든 재벌이든 언론사 사주든 누군가에 의해 왜곡될 것이다”고 말했다. 바로 그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언론이 바로 서야 된다고 강조했다.  

언론의 객관성을 언급한 대목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언론은 사회를 보는 창이다. 우리가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건 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창이 노란색이라면 바깥세상은 노랗게 보일 것이다. 창이 빨간색이라면 바깥세상은 빨갛게 보일 것이다.” 

“언론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편견에 젖어서는 안되고 균형 잡힌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객관적일까?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른데 객관이라는 말이 성립할까? 세상을 빨갛게 보는 사람과 파랗게 보는 사람이 있다면, 객관은 보라색으로 보는 것인가? 정치에서 여당과 야당이 서로 상대방을 공격할 때 객관은 무엇일까? 그 중간에서 둘 다 나쁘다고 비판하는 것일까, 아니면 둘의 입장을 똑같이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것일까? 노동자가 파업을 하고 있을 때는 어떻게 보도해야 하나?”

그는 언론의 객관성을 논할 때 세상에서 가장 남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객관성 혹은 중립이라는 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엄격히 말해 언론의 객관성은 가식이라고 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서로 다른 논조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면서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렇다면 객관성은 아예 없는 것인가?” 그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제시한 답은 바로 사회적 다수와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었다. 우리가 적어도 객관성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먼저 소수 권력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대통령이나 정부, 국회, 재벌, 법원 등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그들이 권력을 잘못 사용했을 때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상상을 초월한다. 권력을 쥔 자는 소수지만 그들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은 다수다. 언론의 일차적인 역할이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들 소수 강자에 대한 다수 약자의 견제를 말한다. 언론이 견제해야 하는 소수 강자에는 정부와 여당뿐 아니라 야당과 다른 언론도 포함된다. 이들 역시 중요한 권력기관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언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인간적인 배려를 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참사 당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여당)은 교황이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지 않기를 원했다. 또 교황이 유족들을 만날 때도 가슴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달지 않기를 원했다. 천주교의 높은 신부 한분이 정치적인 중립이라는 이름 하에 이런 요구를 교황에게 전달했다. 그때 교황은 인간적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언론 그리고 우리 모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다수를 대표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객관성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다. 모든 언론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에 맞는 사실을 수없이 끌어온다. 하지만 그 주장이 진정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사회적 다수를 대표하거나, 사회적 다수가 공감할 수 있거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더욱 보수적인 지역사회에서 과연 통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지역신문 기자로 활동하기가 그리 녹녹치 않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그가 놓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휴가지에서도 그 고민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꾸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기자란, 언론이란 무엇인가?란 근본적인 물음과 함께. 

창간 29주년 완도신문. 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그동안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고자 발버둥 쳐 왔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정의롭게 보이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에게는 완장찬 갑질의 모습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다 우리의 부덕의 소치이며, 주민들과 함께하지 못한 게으른 자기혁신을 했기 때문이이라고 스스로 반성해야 될 일이다.  

내년이면 완도신문이 30주년이 된다. 이제 완도신문은 사명감을 갖고 지역을 위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신문으로 거듭나기 위해 말뿐이 아닌 실천적인 자기혁신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사실 진짜로 보여주려면 이런 글도 필요치 않으리라. 실천은 두말이 필요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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