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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나무 이야기 다섯

[배철지의 완도 황칠 이야기 5]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9.06 13:09
  • 수정 2019.09.06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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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가 가진 황칠특허를 이용하여 만든 황칠도료로 칠한 달항아리.

황칠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옻칠만이 기물에 칠하는 유일한 도료였던 때에 그야말로 홀연히 등장하였다.

나무뿐만이 아니라 쇠붙이나 종이 등 종류를 막론하고 피도체와의 접착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그 빛깔도 금색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니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 우수성은 고대부터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그런데 황칠을 처음으로 기록한 것은 이 나라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가 아닌 중국이었다. 

당나라의 ‘두우(杜佑)’가 편찬한 것으로 상고(上古)로부터 당대(唐代) 현종(玄宗)의 연호로 15년 간(742년 정월 ~ 756년 7월) 사용되었던 천보연간(天寶年間)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본 제도의 변천, 정치의 대요(大要), 주장요론(主張要論)을 연대순으로 아홉 개 부문으로 분류하고 기술하여 801년 8월경에 진상 되었던  ‘통전(通典)’이 처음이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라(백제) 서남해의 세군데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6월에 수액을 채취하여 기물에 칠하면 황금처럼 빛이 나서 눈이 부셨다(國西南海中有三島 出黃漆樹 似小榎而大 六月取汁 漆器物若黃金 其光奪目).” 

황칠나무에 대한 한반도의 첫 기록은 1145년 김부식의『삼국사기』 고구려본기本紀) ‘보장왕 4년조’에 등장한다. 645년 음력 5월 5일에 당나라 태종은 이세적을 선봉으로 삼아 직접 요동성을 공격하여 12일 만에 함락 시킨다. 

“이 때 백제가 금휴개(金髤鎧)를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인 문개(文鎧)를 만들어 바치니 군사들이 입고 따랐다. 황제와 이세적이 만났는데 갑옷의 광채가 태양에 빛났다(時百濟上金鎧 丈以玄金爲文鎧 士被以從 帝與勣會 甲光炫日).” 라는 내용이 나온다. 금휴개는 바로 황칠을 칠한 갑옷을 말하는데 중국의 구당서를 빌어 김부식이 기록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27년626) 기록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27년(626)에는 “백제가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明光鎧-2018년에도 중국에서는 당시의 갑옷을 토대로 명광개로 칭하고 있다.)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고구려가 길을 막고 상국(上國-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막는다고 호소했다. 

이에 당나라 고조(李淵)는 산기상시散騎常侍)인 주자사(朱子奢)를 백제로 보내 조서를 내려 백제와 고구려가 맺힌 원한을 그만 풀라고 달랬다(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 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 來詔諭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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