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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나무 이야기 여섯

[배철지의 완도 황칠 이야기 6]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9.20 13:16
  • 수정 2019.09.20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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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도 중국에서는 당시의 갑옷을 토대로 명광개(明光鎧)로 칭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초가 된 945년에 완성된 『구당서舊唐書)』는 『통전通典)』에 이어서 “세 개의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6월에 상처를 내어 채취하니 그 색이 황금과 같다. (有三島 生黃漆 六月刺取瀋 色若金)”라고 기록하고 있고 이를 기반으로 구양수 등이 1044~1060년에 걸쳐 완성한 당나라의 역사를 서술한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나라가 요동성을 공격할 때 백제에서 당나라에 금칠을 한 갑옷을 바치고 현금(玄金)을 오채(五綵)로 칠하여 산오문개(山五文鎧)를 만들어 보냈으므로 사관들이 이를 입고 종군하였다. 황제 와 이세적이 합류할 때 갑옷이 햇빛에 번쩍거렸다”
 

이어서 1013년에 완성되어서 당·오대 연구에 빠질 수 없는 중요 사료로 꼽히는 북송(北宋) 시대 왕흠약(王欽若)과 양억(楊億) 등이 편찬한 백과사전인 『책부원구冊府ミ元龜)』에는 다음과 같이 여러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무왕 25년 624년 당고조 7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어 “광명갑(光明甲)”을 바쳤다”
 

우측은 당나라 시대의 명광개(明光鎧)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중국 산동성 적산법화원에 있는 장보고 영정(장우성화백)과 중국 시안성에서 발굴된 중국 당나라 시대의 장락공주(長樂公主)의 무덤 벽화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장보고도 황칠이 당나라와의 교역에서 주요 물품 이었고 중요한 전략적 교역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중국 시안성에서 발굴된 벽화와 장보고영정에서 명광개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 갑옷에도 황칠이 칠해져 그 광채가 눈이 부실 정도로 휘황찬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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