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가을의 심장에 멱살 잡힌 그리움

[에세이] 김지민 /수필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0.07 10:22
  • 수정 2019.10.07 10:26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지민 / 수필가

감정은 목소리에서 시작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포슬포슬한 감자 속살빛 소국 한 다발을 두 팔에 안은 듯 풍성한 가을에 묻힌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왔다. 티라미슈케잌 한 조각의 맛처럼 부드럽게 혀끝을 감싸 안고 모든 감각을 갈 내음 가득한 시절로 밀어 넣는 목소리가 귓불에서 대롱거리며 길게 여운을 남겼다.

가을은 한 모금의 레드와인이 심장을 적시듯이 뼛속까지 들어와 휘젓고 다녔다.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살갗을 부비며 애교를 부린다.
한 그루의 감나무가 울타리 밖으로 손을 뻗어 발뒤꿈치를 잡고 조랑조랑 따라온다. 

바람이 응축된 결 사이로 먹빛 농담들이 그윽하게 번져가고 그 틈 사이로 뾰족한 가을 햇살이 주홍색 실타래를 풀어 한땀한땀 수를 놓기 시작한다. 청록색 무늬 사이로 그 옛날 내 집으로 가던 고샅길이 떠오르고 감나무 잎 사이로 기억의 바람이 지나간다.

해마 속에 잠시 머물렀던 아련한 유물 같은 향수의 조각들이 망설이듯 멈춰 섰다가 일필휘지로 화선지에 기억을 그렸다. 햇살아래 펼쳐진 담색 그림 한 폭이 마음으로 들어와 똬리를 틀었다.

논틀길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오르막길이었다. 그곳에서 부터 시작되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간지럽히면서 지나가면 자연스레 탱자향이 어깨동무를 했다 날카롭게 돋아난 가시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품고 있는 은은하고 상큼한 향만큼은 어떤 꽃에게도 뒤지지 않고 비강의 점막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사부작사부작 그리움이라 이름달린 것들과 걷다보면 막다른 길에 다소곳하게 들어앉은 우리 집, 정갈하게 싸리 빗질을 해 놓은 흙 마당 위에 바람에 시달린 감들이 철퍼덕 주저앉아 있곤 했다. 감나무 옆으로 자리 잡은 장독대의 항아리 뚜껑을 열면 소금 먹은 메주가 토해낸 감빛물 위로 볕 좋은 하늘이 빠져있고 구름이 담겨 있다. 감나무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이 가끔 들러 곰삭은 향을 건져가기도 했다.

지금쯤 키 작은 함석지붕 위로 넓게 드러누워 있는 감나무도 주먹만한 감들을 매달고 돌아오지 않는 무심한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게다 인기척 없는 빈집의 주인이 돼버린 줄도 모르고 무던하게 나이 들어가는 오래된 감나무의 그루터기가 머리위에 그늘을 만들고 지나간다.
주홍색 애기 달들이 주렁주렁 걸린 남도의 어느 마을이 나지막한 병풍으로 눈앞에서 펼쳐진다. 가을걷이가 시작될 무렵이면 담장을 훌쩍 넘어온 팔뚝만한 가지마다 감들이 동그랗게 번들거리는 낯빛으로 유혹을 하는 고샅길 위에 깊은 고독이 오기전의 선선한 바람과 함께 내 기억이 서 있다.

감정을 쫓아가는 기억은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지름길임을 안다. 또한 흐릿한 심장을 선명한 붉음으로 채색시키는 애틋한 그리움을 만날 수도 있는 사랑으로 들어가는 간절한 목마름이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