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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시, 너를 만나기로 한 시간

[에세이-고향 생각] 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1.29 11:18
  • 수정 2019.11.2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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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제리는 지난 주 화요일 응급실을 통해 우리병동에 입원한 환자였다. 그가 우리병동의 병실을 배정받은 후 나는 컴퓨터로 그의 병력과 검사 결과들 그리고 닥터오더 내역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몸집이 큰 뼈전문 닥터였다. 그가 병실에 도착한 후, 나는 Admission assessment를 위해 사소한 것까지 꼬치꼬치 질문하기 시작했고 그의 몸의 변화들을 차근차근 프로그램에 입력하고 있었다. 건장한 그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검사결과로 봐서 아무래도 자신은 암이 뼈까지 다 퍼진거 같다며 목이 메여 흐느꼈다.

"I am so sorry~~"  나는 그저 크리넥스를 건네며 그의 어깨를 안고 토닥여 줄 뿐이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카운티병원 암병동이다. 이곳에는 처음으로 암을 진단받아 고도의 스트레스에 빠진 환자, 항암치료를 위해 내원하는 환자, 그리고 죽음을 앞둔 마지막 단계의 환자들이 주로 내게 배정되는 환자들이다. <오후 네 시, 너를 만나기로 한 그 시간> 나는 요즘 어린왕자의  오후 네 시에 관하여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걸까? 어쩌면, 오후 네 시 란? 소중한 것을 앞 둔 가장 절절한 시간을 이야기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오후 네 시 란 과연 언제인 걸까? 한국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거의 두 주가 넘도록 아파서 병원에 출근할 수가 없었다. 일하지 못하고 집에서 머무는 시간들은 나를 무기력하게 했고 또 우울하게도 만들었다. 그 후로 나는 일하러가는 시간이 힘들고 때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설렘이 가득한 오후 네 시로 만들기로 했다. 일부러 나는 나 자신에게 '야호!'를 외친다.

"야! 신난다! 나는 내일 일하러 간다!"

"어떤 환자들과 새로운 상황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난 어떻게 그 일들을 지혜롭게 헤쳐 나갈수 있을까?" 바깥풍경은 빛으로 장엄하게 정염을 토해내는 석양으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어린왕자를 꺼내 다시 읽었다. 그의 맑은 문장들을 통해 나는 오롯이 감미로움 속에서 눈을 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Thanksgiving Holiday에는 병원에서 20파운드짜리 칠면조 한 마리씩을 선물로 준다. 요리하기도 귀찮고 잘못 요리하면 너무 퍽퍽해서 그닥 좋아하지도 않기에 안 받으려 했는데, 동료가 내 대신 받아다가 갖다 주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는 칠면조요리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그것을 보고있던 제리가 밝게 웃으며 나에게 자상하게 요리법을 설명해 준다. 오븐 베이크로 화씨 200도에서 10시간, 재료는 소금과 후추, 버터스틱 2개, 샐러리, 양파, 마늘, 오븐베이크용 백이 전부였다. 조금 전까지 통증으로 힘들어하던 그가 나에게 레시피를 설명하는 동안에는 얼마나 행복해 하던지, 그의 레시피 대로 따라 해 보고 싶어졌다. 퇴근 길에 마트에 들러 재료들을 샀고 밤이 늦었지만 칠면조를 그가 가르쳐 준 그대로 준비해서 오븐에 넣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그의 레시피가 만들어 낸 판타스틱한 맛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요즘, 나는 달라지고 있었다. 지금 내 인생의 이 순간이 바로 오후 네 시일거라는 절절함 때문이다. 내 환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살아있는 동안 꼭 하고 싶었던 일들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은 그리 거창한 일들이 아니었다. 석양을 바라보면서 차를 마시는 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일, 가족을 위해 칠면조를 굽는 일, 크리스마스 장식을 손수 만드는 일 등 그런 하잘것 없어 보이는 일을 즐기면서 함께 사랑을 나누는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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