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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에 걸맞는 광복절 기념식 어렵나

[사설] 항일운동의 강성지 완도가 광복절 기념식이 없는 것은 말이 안된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08.14 11:24
  • 수정 2020.08.1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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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75주년 광복절이다. 광복절(光復)은 영예롭게 회복한(光復) 날(節)이란 뜻으로 1948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한반도가 일제에게서 독립해 국권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한국의 법정 공휴일이다. 이날 전국적으로 경축행사가 벌어지고 특히 대통령이 직접 축하연설을 하는 경사스러운 날이다.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해방돼 국권을 회복하고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한 과정을 아울러 광복으로 명명해 기념하고 있다.

정부수립 과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제로부터의 해방, 광복은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항일운동을 줄기차게 해온 우리 선열들의 민족과 나라를 위한 헌신과 희생에서 비롯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완도군 또한 광복을 위해 활동해 온 항일운동에서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반외세를 내걸었던 동학농민혁명 참가부터 일제의 침략·수탈 길잡이 역할을 했던 1909년 당사도 등대습격 의병 의거,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는 완도 3·15 만세운동, 섬 사람 대부분이 불령선인으로 불리며 송내호 선생을 필두로 항일정신에 투철했던 소안도의 조직적인 항일운동, 1920년대 말 총 85명의 피고인 중 광주 출신 12명 다음으로 많은 8명이었던 장석천 선생을 중심으로 한 완도 출신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동자들. 1930년대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맞선 호남지역 민초들의 항일투쟁운동이었던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주도 등 굵직굵직한 사건 외에도 완도의 항일운동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완도의 선열들은 전국 차원의 항일운동에서 항상 앞장섰으며, 때로는 동양 삼국을 무대로 활동하였고 때로는 완도지역을 중심으로 항거했다. 이 때문에 완도는 일제강점기 함경도 북청, 경상도 동래 등과 함께 가장 격렬한 항일운동을 펼친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리웠다. 
 

반도 남단에서 이렇게 항일운동으로 유명한 완도에서 광복절 기념식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항일운동기념사업회, 독립유공자유족회 등 항일운동, 광복과 관련한 지역 민간단체들이 있는 마당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이런 의미있는 날 이 기념식이 없다는 것은 행정의 안일한 대처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 완도가 항일운동을 통해 민족광복에 기여한 바는 크다. 그런 자랑스런 역사와 정신은 후손들에게 자자손손 이어져야 할 우리의 유산이다. 그에 걸맞는 형식인 기념식은 이제라도 반드시 치러져야 한다. 그것이 광복을 위해 피 흘리며 헌신과 희생해온 우리 지역 선열들에 대한 도리이자, 우리 완도를 앞으로 짊어지고 나갈 후손들에게 물려줄 우리들의 임무이자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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