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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완도신문, 창간 배경과 과정은?

[창간30주년 특별기획 - 옛날 완도신문 이야기] 지방자치기틀 마련 수단 지역신문 필요성 대두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20.09.11 10:40
  • 수정 2020.09.18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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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인 민주화 열기 지역으로 확산…지방자치제 부활
지방자치기틀 마련 수단으로 지역신문 활성화 필요성 대두
88년 황종환 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 지역신문 창간 첫 제안
2년 뒤 90년 지역신문 필요성 재부각돼 구체적 추진
야당성향 발기인 참여자 많아 창간 당시 야당·운동권 신문 비판도

1987년 민주화운동은 1988년 국민주 한겨레신문 창간으로 이어졌다. 중앙으로 결집됐던 민주화 열기는 다시 지역으로 번져 나갔고, 군사정권에 의해 중단된 지방자치의 부활로 옮겨가는 분위기였다. 지역신문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홍성신문을 시작으로 하나둘 창간되기 시작했고, 완도신문도 그렇게 1990년 지방자치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도구, 수단으로서 지방언론 활성화 필요성에 의해 창간됐다. 또 당시 창간호 이전 소식지에 보도된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지방일간지가 지역소식을 심도 있게 다루는 게 미흡하고 당시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큰 것이 지역신문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였다.

완도신문 창간 과정을 살펴보면 창간호에 김정호 초대 편집장은 그 발단에 대해 창간보도기사에서 “1988년 하순 완도군 완도읍 주도리 국민운동본부 사무실에서 황종환(당시 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 씨가 지방자치제 실시를 앞두고 있는 마당에 지방자치제에 부응해 완도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역할을 할 지역신문을 만들어보자고 동료들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오랜시간이 지난 90년 초에 지역신문의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어 구체적으로 추진을 하게 됐다.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완도신문으로 창간될 줄 그 아무도 몰랐다”고 이렇게 써놓고 있다.

다음은 지역신문 창간에 뜻을 모은 동지들의 본격적인 설립 절차에 나섰는데 당시 전 대경화물 사무실을 임시사무실로 정하고 당시 경인매일신문사에서 근무했던 김정호 현 발행인을 상근하도록 했다. 또 최초의 지역신문인 홍성신문를 비롯해 해남·거창신문의 운영 실태를 견학하고 완도신문의 창간계획을 보완해 나갔고, 4월21일 발기인대회에서 신문의 정치권력 및 특정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전 군민을 대상으로 주식을 공모하여 자본을 마련키로 결의했다.

이경국씨를 창간추진준비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서정창·박광식·김종익·최상문·최충옥·황남대·이심기·이경일·임금택·임재석·최병진·이만동·김태우·조재영·서해식·송철수·황번하·장옥남·백준호·강석근·문동영·박연하·이장근 등은 준비위원으로 선출됐다.

1990년 7월 28일 오후2시 창간추진준비위원회에서 추진위원 전원이 이사로 선임됐고 감사로는 문동영 씨와 김종익 씨를 선출했다. 이 기구는 잠정적으로 주주총회 때까지 주요 사항을 논의하는 기구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이날 회의에서 당초 그해 8월26일 창간예정이었으나 9월8일로 연기가 확정됐으며 창간기념행사는 위원장에게 위임토록 했다.

또 창간호 ‘군민 성원이 이룬 새 언론 / 각기 다른 읍·면 하나로 묶는 매듭역할’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완도신문에 관심을 보인 발기인들은 야당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다소 많이 참여해 야당신문이나 운동권 신문이라는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이런 말들이 전반적인 침체분위기로 몰고 갔고...”라는 대목에서 당시 완도신문의 성향을 짐작케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발기취지를 실은 5월 12일자 준비호 첫째호를 비롯 발기인 명단과 발기인 모집 안내를 실은 7월3일 둘째호, 8월14일 셋째호가 각각 1만부씩 3만부의 소식지는 홍보지로 톡톡히 한몫했다.

7월3일 소식지 둘째호에는 ‘발기인 2백2명 모집 / 창간기금액 3,600만원 초과’라는 제하의 발기인 모집 관련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그해 6월30일 현재 창간 발기인이 202명으로 모집되었고 (제목과는 약간 차이가 나는) 3,700만원의 기금이 모급되어 8월 초까지 400명 발기인 모집 이상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실제로 5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발기인 모집은 그동안 군민들이 얼마만큼 참다운 지역언론을 갈망해 왔는가를 보여주 듯 각 읍·면 각리 각층에서 대단한 관심과 참여의 손길이 이어졌고 발기인 대회를 성황을 이뤘다.

그렇게 ‘지역민이 만드는 최초 신문’ 완도신문이 탄생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여파와 ‘지역소식을 심도있게 다루는 지역 언론’에 대한 군민의 염원을 안고 태어난 신문이 바로 완도신문이었다. 그 뒤 30년 동안 완도신문은 완도사회의 맥을 잇는 역할,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하는 지역대표 신문으로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때로는 살아있는 정치권력인 김종식 전 완도군수에 맞서 7년에 걸쳐 153번의 소송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군수 부인 실형 보도에 광고가 중단되는 등 자본권력의 탄압도 받았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는 사훈을 창간정신으로 1990년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참 언론을 갈망하는 군민들의 뜻을 모아 ‘지역민이 만드는 최초 신문’인 만큼 견디어 냈고 언론의 역사적 소명에 충실한 것을 신문의 신뢰도와 인지도에서 군민 독자들이 보여주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아직 나이 서른에 부족한 것이 많고 지역매체 환경도 창간 때와는 달라져 있지만 “쓴소리 할 때 쓴소리하고 대안을 제시할 땐 대안을 제시하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의 길을 완도신문을 사랑하고 응원해주는 군민 독자들이 한사람이 남을 때가지 걸을 것을 창간30주년을 맞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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