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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도어민 해상시위·군의회 개원·초대 민선군수 취임

[창간30주년 특별기획 - 그때 그 기사] 옛날 완도신문 이야기 1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20.09.18 11:36
  • 수정 2020.09.2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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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기사] 1. 노화읍 넙도어민 해상 시위

완도신문 1990년 12월23일자 ‘노화읍 넙도어민 해상 시위’ 보도기사는 충격적이다. 기사 내용을 보면 “12월 1일 해일을 동반한 폭풍이 몰아닥쳐 완도군 노화읍 내리·서리·방축리 등 넙도일대 1천5백여명의 생계가 막막하다. 이에 지난 18일 김 피해보상 증액을 요구하며 30여척 소형어선과 해태채취어선에 2백여명이 분승, 완도읍 주도 앞바다에서 오전10시부터 오후6시까지 해상집단시위를 벌렸다. 이날 ‘완도군 넙도지역 김발피해 보상 대책위원회’ 주최의 해상시위는 이지역 어민의 실태와 지방행정의 한계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리드문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추측할 수 있다.

이 기사는 당시 26세의 넙도어민회 총무 박기태 씨 발언을 통해 2~3m의 높은 파도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걸고 집단해상시위를 벌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번 재해로 넙도 일대 피해는 40억원에 이르고 있지만, 완도군 재해대책본부는 1책당 시설비 7만1천원으로 피해액을 산정, 모두 6억여원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 이를 토대로 보상액을 지급할 예정이어서, 어민들의 실질적 피해 복구비인 1책당 14만2천원에 절반 밖에 미치지 못하고 있어 생존권 투쟁을 벌릴 수 밖에 없다”

1면 탑기사에 이어 2면엔 긴급현장인터뷰 “더 이상 일을 것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피해대책부위원장 박문환 씨(28)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2백여명의 넙도어민들은 30여척의 어선에 몸을 싣고 피해보상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완도 앞바다에서 해상시위를 하고 있었다. 구호라기 보다는 피맺힌 절규의 소리였다”는 기사 첫문장이 심각한 당시의 상황을 잘 기록하고 있다.

당시 김정호 편집국장이 직접 배로 건너가 인터뷰했다는 설명과 첫 질문의 답변과 마지막 답변이 넙도 어민들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왜 왔는가? / - 이대로 앉아 죽을 수 없어 살길을 찾기 위해 나섰다.”
“-만약 피해어민의 뜻이 관철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 - 우리는 이미 죽은 목슴이다. 가진 것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우리의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 죽음을 무릎쓰고 싸워 쟁취하겠다”
 

[그때 그 기사] 2. 30년만에 지방자치 부활, 완도군의회 개원

1991년 4월 14일자 완도신문은 1면 탑기사로 “15일 지방의회 개원 군민 기대 커”라는 제목으로 30년만에 실시된 지방자치제도가 지난 3월26일 선거시행 이후 완도군 의회 13명의 의원을 탄생시킨 후 지난 4월9일 의회 개회식의 공고 이후 오는 15일 군청4층 군의회 회의실에서 개회식과 함께 의회의 개원으로 의정활동의 첫선을 보인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조금 더 기사의 내용을 싣자면 “이날 첫선을 보일 의회 개획식에서는 의원들에 의해 무기명 투표로 임기 2년의 의장과 부의장 각각 1명씩을 선출하고 이날 당선된 의장의 개원사로 30년만에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된다. 완도군 총유권자 5만7천2백23명 중 4만2백32명이 참여 71.9%의 투표율로 타군에 비해 높은 투표율로 지방자치시대에 높은 관심을 보인 군민들은 첫 개원소식과 함께 내고장과 내마을을 위한 의원들의 활동에 자못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모습이다”라고 당시 의회 성립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완도군 초대 지방의회는 4월15일 첫 임시회의의 소집과 함께 지방의회의 내용을 보면 정기회의는 매년 12월1일 소집되며 30일 이내의 정기회의와 10일 이내의 임시회의를 합쳐 연간 60일을 초과할 수 없다고 공고내용이 나온다.

또한 지방의회 의원들에게 주는 혜택으로 회기동안 일당이 지급되고 의회계의 관계자에 따르면 의원들의 일당은 3만원으로 규정, 년중 60일 회기에 1백80만원을 받게 되며 국회의원이 누리는 회기중 불체포 특권과 면책특권은 없다. 그리고 의원들의 무기명 투표로 선출되는 기초의회 의장에게는 별도 사무실과 여비서 1명이 배정되고 운전기사가 딸린 1,500cc급 업무용 승용차가 의원들과 함께 사용될 수 있게 제공되며 기초자치단체의회는 10여명의 직원과 전문위원을 두어 의회기능을 보좌하게 된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1991년 4월 21자 완도신문에는 “10만 완도군민의 결솔과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완도군의회 초대 권철(당시 55세, 금당면) 의장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때 그 기사] 3. 그때도, 지금도 문제인 '김양식 염산사용'

1994년 4월3일자 완도신문 탑기사에 “김양식 염산사용 자제를”이란 제목으로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김양식 염산 사용 문제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김 사용 염산 사용문제는 올해 7월20일에도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올랐던 사안이다.

1994년 당시 보도내용을 한번 살펴보면 “수산청은 해태양식시 어민들이 김의 ‘색택과 병해방지’ 목적으로 사용하는 무기산(염산) 투여가 인체에 ‘유해성’ 논란 및 소비둔화에 영향이 있다고 보고 이를 근절하여 양질의 해태생산을 도모키 위해 ‘유기산’으로 전환하는데 소요되는 26억원의 자금을 내년부터 지원키로 했다. 지난 3월16일 완도를 방문한 이희수 수산청장은 어민과의 대화에서 바다정화 사업에 관한 집중적인 지원사업비를 건의받고 ‘바다는 우리들의 보고이므로 어민 스스로 바다를 지키려고 할 때 정부에서도 바다정화 사업을 할 수 있다’면서 무기산 처리에 언급, ‘무기산은 어장을 황폐화시키는 원인도 되지만 국민건강에도 해를 끼친다’면서 국민보건향상과 고품질 생산을 위해 지원하게 될 것으로 답하고 양식장을 돌아보고 확인하기 위해 완도에서 고흥 녹동으로 선편을 이용 이를 확인하고 이같은 대책을 세웠다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때 그 기사] 4. 완도 단독선거구 쟁취 운동

1995년 2월 12일자 완도신문은 “완도 단독선거구 국회청원”이란 제목으로 국회의원 단독선거구 추진위원회(위원장 최종홍)에서는 지난 7~8일 양일간 단독선거구 분구를 위해 완도군의회 유귀석 의장 최형석 동의원, 차관훈 부위원장, 민자당 이심기 부위원장, 강태종 청년회장, 정길봉 JC회원 등 지역유지 10여명과 재경 향우회 임원 등 20여명은 국회를 방문 관련 국회의원들을 만나 선거구 조정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고 오는 3월 임시 국회에 청원할 문제점들을 보완하는 등 심도 있게 타결을 보았다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는 정치권의 행보가 가장 큰 변수로 작용될 전망이라고 하고 있는데 각 정당·입장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대안제시를 하기 때문에 선거구가 줄어들 경우 국회의원 수가 줄고 상대의원의 능력에 따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현행선거구를 그대로 유지시키므로 자기들의 위기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면 문구는 말로만 눈에 보이게 행동할 뿐 내용은 그대로 있을 수 밖에 없다면서 다행히 완도출신 박광태 의원이 12인 소위원회 위원으로서 완도분구에 관한 남대른 관심으로 강한 의지를 볼이고 있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완도 단독선거구 쟁취는 되지 않았고, 완도군민들은 실망이 커 그 후유증이 매우 컸다.
 

[그때 그 기사] 5. 차관훈 초대 민선군수 취임

1995년 7월2일자 완도신문은 민선 초대(제32대) 차관후 완도군수 취임식 기사를 다루고 있다. 7월1일 11시 군민회관에서 지방의회의원 당선자, 군민, 유관기관단체장, 출향인 ㅣ등 1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고 이날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 앞서 차관훈 군수는 충혼탑을 참배하여 헌화 및 분향하고 취임식을 가졌다. 대통령의 축하 및 메시지와 장관 축하전문 낭독으로 시작된 취임식에서 차관훈 군수는 취임선서와 약력 소개가 있었으며, 차군수는 취임사에서 “현재의 재정자립도는 빈약하지만 수려한 관광자원과 청정해여그이 고부가 가치가 있는 수산물 생산으로 자립도를 높여 가도록 하겠다”고 말하고 “선거를 통한 갈등을 없애고 살기좋은 완도, 화합하는 완도, 풍요로운 왇노건설에 중점을 두고 지방자치를 이끌어 가겠다”고 밝혔다.

차관훈 초대 민선군수의 약력도 이날 신문에서는 소개하고 있는데 완도읍 화흥리에서 39년 12월28일에 출생하여 완중, 목포문태고등학교를 졸업, 고향에서 살면서 농촌계몽운동과 야당생활을 30년간 해왔다고 기록돼 있다.

이어 평소 성격이 온화하면서 대쪽같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지도력이 있는 야당지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김선태·황권태 선생의 지도를 받아 야당생활을 해오면서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지조있는 야당생활을 해오면서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제14대 대통령선거 김대중 후보 완도군 선거대책본부장, 국민운동본부 완도군 상임의장, 민주당 전남도지부 부위원장, 농·수산 특별위원장, 한국내외문제연구회 정책위원, 아·태재단 중앙위원, 민주당 완도·강진지구당 부위원장 등 야당간부직을 지켜왔다고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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