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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의 달

[완도 시론] 정택진 /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11.06 10:04
  • 수정 2020.11.0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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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로서의 존재는 유약하다. 그것들은 살아남기 위해 함께하는 방법을 택했다. 먹이사슬의 가장 윗자리인 사자나 호랑이도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집단으로 사냥에 나선다.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인간도 사실 개체로 있을 때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로 모여 사회를 이루었으므로 인간은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생존의 측면에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약한 존재이다. 인간은 혼자서 호랑이를 잡을 수도 없고, 일반적 상황이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바퀴벌레를 먹을 수 없다. 바퀴벌레는 혼자서도 몇 만 년을 생존해 왔지만 말이다.

‘함께한다’는 것이 비단 물리적 현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고통이나 고민을 서로 나눔으로써 그것을 반감(半減)시키기도 하고, 기쁨이나 즐거움을 함께함으로써 그것을 배증(倍增)시키기도 한다.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줌으로써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입장이 바뀌어 위로했던 대상이 상대를 위로하기도 한다. 함께함으로써 인간은 정서적 유대를 가지며 그럼으로써 정신적 존재로서의 삶을 지탱한다. 

코로나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뿌리를 알아야 그것의 뿌리를 뽑을 터인데 그 뿌리를 모르니 마스크만 쓰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마스크가 유일한 백신이다. 적의 심장부를 발본색원해야 더 이상의 침략이 없을 터인데 그러지 못하니 성곽 밑에 몸을 숨긴 채 그저 날아오는 화살이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공중에서 구십도로 꺾어지는 화살이 날아든다면 방어벽도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고기를 잡고 있는 내가, 농사를 짓고 있는 이웃의 친구가 코로나 백신을 개발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다. 코로나의 시간에 우리는 백신이 나올 때까지 마스크를 쓴 채 서로를 멀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코로나가 없어질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일상을 사는 우리의 현실은 그렇다. 

그렇게 마스크를 쓰고 살다 밤이 되어 들에 나갔다. 하늘에 보름에 가차운 달이 떠 있었다. 누렇게 익은 나락들 위로, 그 사이로 나 있는 길 위로, 저 멀리의 나무들 위로 달빛은 쏟아지고 있었다. 분명히 작년에도 나는 이 달빛 아래 있었을 텐데 전혀 그 달빛 같지가 않았다. 들에 비친 달빛은 내 어릴 적 동무들과 뛰어다니던 달밤의 그 달빛이었다. 그때의 나로부터 지금의 나까지는 사십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고, 인간의 것들이 하늘로 올라갔고, 그래서 그것들에 의해 탁해지고 더럽혀졌을 텐데도 금년의 달빛은 어쩌자고 사십 년 전의 그 빛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었다. 

나는 금년에 아주 오랜만에 달을 우러르었다. 그것은 코로나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전 같으면 그 시각은 술시여서 사람들과 어우러져 술잔을 들고 있을 시각인데 지금은 ‘따로’여야 하므로 나는 들길을 걸었고 그리고 달을 바라봤으니, 억지스러울지는 모르지만 코로나로 인한 것은 맞다.

세상의 어떤 것도 완전하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반성의 계기를 갖게 하거나 경계의 생각을 갖게 한다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것에도 일정 정도의 긍정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돌 맞을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코로나도 그렇다. 이미 있는 것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우리는 있는 것 안에서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함께’는 소중한 가치지만 우리는 너무 그것에만 몰입하지는 않았는가. 그럼으로써 ‘따로’라는 것을 너무 도외시하지는 않았는가. 혼자 보는 저 달, 그 달을 지나가는 구름, 그리고 또 나를 스쳐가는 바람, 그 바람이 쓸고 가는 저 들녘 그런 것들 말고 우리는 너무 우리끼리만 모여 살지 않았냐는 말이다. ‘함께’는 ‘따로’의 바탕 위에 서야 그 가치가 빛나 보일 수 있다.
오늘도 달은 세상을 비출 거고, 나는 그 아래에서 따로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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