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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바람이 들었나보다

[에세이-횡간도통신] 박소현 / 횡간도보건진료소 소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12.04 10:38
  • 수정 2021.09.29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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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많이 부는 곳에 살다 보니 '무에 바람든다'는 말처럼 내 마음에도 이미 바람이 들었나 보다. 이맘때가 되면 시간아, 얼른 가 버려라... 서둘러 한 해를 보내고 내년엔 무언가 잘 풀릴 것 마냥 그저 새날이 오기만 기다렸다.

이번엔 좀 다르다.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직 처리 못한 업무는 물론이거니와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 때문에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해가 가기 전 그 마음 다시 돌릴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두 눈에는 또르르 눈물이 흘러나오니 바람든 게 분명하다.

며칠 전 동네 어머니가 메주를 쑤려고 콩을 삶으며 나를 주려고 장작불에 고구마 몇 개 얹어 군고구마를 해오셨다. 엄마가 공부하던 모습, 수료식에 찍은 사진을 자녀들에 보내드리려고 “엄마 사진 누구한테 보내줄까?” 했더니, 대뜸 “나는 못 보내것소.”하신다.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아이들 학창 시절 이야기를 꺼내신다. “우리 애기들이 공부를 참 잘했어라. 초등학교 다닐 때 점심시간 되면 흰 쌀밥 먹는 집 가서 식사 드시제 꼭 우리 아그들 따라와서 고구마에다 김칫가닥 집어 잡수고 가시곤 했어라. 중학교 근처로 보낼라고 하니, 우리 애기 손잡고 광주 가서 입학시켜 주면서 꼭 성공할 놈이라 했는디, 뒷바라지를 못했소. 우리 새끼들도 못난 부모 만나서 대학을 못 보냈는디 어트게 내가 그 모자 쓴 사진을 보내것소?” 

그렇지 않아도 눈이 평소 좋지 않은 분인데 눈물이 흘러내린다.
 “다른 사람들은 자식들 졸업사진 걸어 논 옆에 나란히 걸어두면 얼마나 좋것소만 나는 그냥 내 마음속으로만 간직할라요. 어떻게든 갈치고 싶었는디 안됩디다. 내가 우리 손녀한테 그랬어라. ‘너는 꼭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라. 그것이 내 한(恨)도 풀어주고 느그 아부지 한도 풀어주는 길인께.’ 했는디 참말 대학 갔어라.” 손녀 이야기를 하시고는 그제야 웃음이 배어 나온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지금 자랐다면 나랑 동갑내기일 막내딸이 어릴 적 병치레를 앓아 갑자기 보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듣고, 딸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야지 하면서 그냥 내가 가까이 사는 딸 노릇 해드리자 했건만, 눈물샘을 건드리고 말았다. 

가슴 속 응어리진 이야기들을 한참 풀어내며 돌아가신 남편 이야기 까지 몇 차례 울다 웃기를 반복하시다가 "어쩌다 보니 소장님한테 내 살아온 일 다 말해버렸다" 하신다.

그날 밤엔 유독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어릴 적에 고슴도치처럼 까칠한 수염으로 내 볼에 대고 비비시면 나는 한껏 아빠를 밀어내곤 했었다. 내가 거실 바닥에 엎드려 텔레비전을 볼 때면 어릴 때는 물론이고 서른이 훨씬 넘어 다 컷는데도 아버지 눈에는 내가 아기 같은지 내 머리를 곱게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왜 그토록 다정하지 못한 딸이었을까? 

동네 엄마 아빠들은 내가 이 마을에 온 뒤로 손 인사를 배우셨다. 처음에는 가까이 와야만 그저 목소리로 “어디 가요?” 하시더니 내가 멀리에서 보이는 분께도 열심히 손을 흔들었더니 이제는 엄마 아빠들도 나를 보면 손을 흔드신다. 아빠가 살아 계셨을 적 학교에 태우러 오실 때, 병원 출근시키고 집으로 가실 때 나는 왜 한 번도 아빠에게는 손을 흔들어 주지 못했을까? 다음 주에 원격진료 수기에 응모해서 최우수상을 받는다. 상장받으면 아버지께 한번 다녀와야겠다.

나처럼 눈이 큰 아빠는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꾹 참으시며 우리 딸 이쁘네! 하시겠지? 올해는 다부지게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싶다. 새해가 온다고 해서 그냥 모든 상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12월 마지막 한 달을 잘 매듭지은 자에게만 새롭게 열리는 새해라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내가 작년 겨울 지은 시를 올해 마지막 선물로 전해드리며 2020년을 완도신문과 함께 한 모든 분께 감사를 전한다. 

 창(窓)

나 창을 닦을라요 네모난 열 개의 창
오늘은 시작이니 한 개만 닦을라요
비바람 몰아쳤던가 얼룩덜룩 뿌옇소

나 창을 닦을라요 내 마음 창문까지
세 개째 닦던 날에 흰 눈이 내려왔소
희멀건 고운 얼굴이 언뜻언뜻 비쳤소

한 개가 남았네요 닦기가 떨리네요
언제고 들여다본 그대 고운 눈동자
동공 속 수정체 모습 그것마저 보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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