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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집안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12.11 10:53
  • 수정 2020.12.14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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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이유가 ‘측미側微하다는 점’이다. 즉 집안이 가난하고 보잘것없기에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두목이 장보고 생전에 집필한 ‘번천문집’권6 ‘장보고정년전‘에 의하면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은 자기 나라에서 서주러 와 30세에 무령군중 소장이 되었다. 장보고의 나이는 30이고 정년은 열 살 젊어 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함께 모두 싸움을 잘하였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적었다.

【張保皐.鄭年傳】
新羅人 張保皐·鄭年者 自其國來徐州 爲軍中小將 保皐年三十
年少十歲 兄呼保皐 俱善鬪戰騎而用槍 其本{國與徐州 無有能
敵者 年復能沒海 履其地五十里不噎角 其勇健 保皐差不及年』

마상 무술에 뛰어나지 않았다면 장보고는 무령군중 소장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말을 타고 무예를 펼칠 수 있는 무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좋은 스승을 모시고 직접 말을 타면서 배워야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장보고의 집안은 말을 가지고 있는 집안으로 무술을 지도할 수 있는 스승을 모실 수 있는 부유한 집안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에 걸쳐 지방에 호족들이 많이 있었는데, 장보고의 집안도 서남해안 즉 완도를 주축으로 하는 호족이었을 것으로 여기는 학자들이 많다. 
‘인동장씨 대동보’나 ‘장씨연원보감’을 보면 장보고의 부친은 당나라 절강성 용흥부 사람으로 신라를 왕래하다 신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장씨 연원보감이 중요한 것은 장보고 시대에 이미 완도에서 중국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장보고가 중국에 건너가기 전에 완도에서 이미 중국과 민간형태의 소규모 무역을 하고 있어 장보고가 무역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무역하면서 해적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무예와 군사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짐작되며, 나아가 장보고의 집안이 무역을 위해 군사를 키웠던 완도를 중심으로 한 호족 집안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주시할 것이 또 있다. 장보고 대사가 청해진을 설진 하고 맨 처음 실행한 것이 병부를 통한 해적소탕이었다. 장보고 대사가 흥덕왕으로부터 1만 군사를 지원받지 않았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군사의 이동기록이 없는 것과 당시에 그 정도의 군사를 줄 수 있는 여유가 신라 왕실에 없었다. 그렇다면 해적을 소탕한 청해진 병부의 군사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도 해상에서 전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군사들은, 오랫동안 바다에 익숙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 군인인데.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당나라 무령군을 전역한 신라인들을 귀국하면서 청해진을 건설하기 위해 동반 귀국한 군사들이거나, 둘째 장보고의 집안이 완도에 거주하면서 부와 군사를 거느렸던 호족이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결론은 무령군은 육군이었기에 바다에서 전투는 어려웠을 것이며, 귀국할 때 많은 사람이 함께 귀국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 군사들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통일신라 후기 들어 왕실의 정권이 약해지면서 변방에 대한 통제능력의 부재로 호족들이 번성하였다.

장보고의 가계 또한 완도를 기반으로 바다를 상대하는 호족이었기에 바다에 익숙한 군사들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한 즉시 맨 먼저 바다에 숙련된 군사들을 이끌고 해적을 소탕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결론은 장보고는 측미한 가정이 아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성씨 또한 백제계 신라인으로 당당히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청해진이 설진 된 완도읍은 백제 시대 색금현(塞琴縣)에 속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통일신라 때는 양무군(陽武郡) 침명현(浸溟縣)에 속했다. 장보고는 옛 백제 땅에 태어난 백제계 완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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