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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와 적산 법화원Ⅰ(20회)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2.05 10:53
  • 수정 2021.02.0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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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2~3시 무렵에 적산의 동쪽 해변에 배를 대니 북서풍이 몹시 분다, 적산은 순전히 바위로 되어있으며 매우 높다, 이곳은 문등현 청년향 적산촌이다,
 산속에 절이 있는데 그 이름은 적산법화원이다. 이는 장보고가 처음 세운 절이다“고 하였다.
 엔닌의 일기 839년 6월 7일 자 법화원에 대한 기록이다.

 2001년에 발표한 서윤희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장보고는 교역 활동을 위해 적산 법화원을 건립하였고, 그곳을 중심으로 신라인 세력을 모아 법화원의 운영이나 해상교역에 이들을 이용함으로써 재당 신라인 사회의 실질적 우두머리로서 등장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법화원의 창건 연도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서로 다르다. 
 김문경 교수는 ‘820년대 초’ 혹은 ‘820년 전후’ 
 이영택 교수는 ‘청해진 설치 이전’, 
 이종훈 교수는 ‘청해진 설치 이후’로
 권덕영 교수는 ‘청해진을 설치한 전후’, 
 고락화 중국 해양대학교 교수는 823년 당 목종 3년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정확한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장보고가 무령군에서 물러난 이후에 창건하였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신라와 당나라의 교역 중심지인 산둥반도 일대에는 신라인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고향을 떠나온 신라인들의 집합소이자 신앙 의지 처로 절을 세웠는데, 이 절을 ‘신라원’이라 했다.
 대표적인 신라원은 장보고가 산동 반도 적산촌에 세운 ‘적산법화원’이다. 
  ‘법화원’이란 이름은 창립 법회에서 천태종 파에 예속된 승려에 의해 법화경이 독경 되었기에 ‘법화원’이라 이름 붙였다.
 장보고는 ‘법화원’을 창건함으로써 재당 신라인들을 신앙이라는 공통점으로 함께 할 수 있었다.
 법화원은 해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예배 처였으며, 당나라로 건너가는 신라, 일본의 승려를 비롯한 상인들에게는 숙박소였으며, 당나라를 왕래하는 신라, 일본 사람들의 외교 공관 역할을 하였다. 
 당의 사절들이 해로로 신라에 건너올 때는 등주를 거치게 되며, 반드시 적산법화원에 들려 미리 신라의 사정을 알아보며 사행에 편의를 도모하였다는 것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법화원’은 적산촌 일대 신라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장보고는 법화원을 운영하기 위해 쌀 500석을 수확할 수 있는 장전을 적산 인근인 척산벌에 마련해 주었다.
 이를 보면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치하기 이전에 이미 당나라에서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재력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법화원에는 승24, 니(여승, 비구니)3, 노파2명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승방, 니방, 객사, 창고 등이 있는 큰 절로, 절의 관리는 신라 통사 압아 장영, 임대사, 왕훈 등이 맡고 있었다.

 적산법화원에서는 본국과 같이 해마다 8월15일을 전후로 3일 동안 축제를 열었으며, 여름에는 금광명경, 겨울에는 법화경을 정기적으로 강의했다. 
 매년 11월 16일 시작하여 다음 해 1월 15일에 끝을 맺는 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강회에는 매일 40명 정도의 신라인들이 모였다.
 신라풍속과 신라어로 진행된 강경예참의 최종 2일간에는 각각 250명과 200명이 참석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이곳 신라인 사회의 규모와 장보고 세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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