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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와 장흥 천관산

천한 해도인의 딸이라 반대하자, 장보고는 드디어!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2.05 11:20
  • 수정 2021.02.0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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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천관산에 존재하는 천관사이다. 장보고의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볼 수도 있다. 쉽게 말해 천관사가 없었다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버리는 역사의 우를 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 역사의 흐름에 천관사가 엄연히 존재한다.

신라 천년에서 왕이 살해를 당한 것이 딱 두 번이다. 장보고에 의한 민애왕의 살해와 후백제를 건설한 견훤에 의한 경순왕의 자살이다. 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의 중심 역사로 보고 신라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려고 하는 신라사관의 학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치욕스러운 불명예스러운 감추고 싶은 역사일 것이다. 그러나 감춘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장보고의 역사도 감추고 싶었을 것이고 감출 수 없다면 최대한 비난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반란군이라 했고, 반역이라 했다. 반란을 꾀했다는 장보고를 끌어들인 것은 바로 신라왕실이었다. 신라왕실의 정통성이 무너지고 민애왕이 희강왕을 죽이고 세자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왕위에 올라버린 것이다. 당시 흥덕왕의 세자로 민애왕 대신 왕위에 올라야 하는 서열상 최고자인 김우징을 무시하고 왕위에 오른 희강왕을 죽이고 민애왕에 왕위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24살에 불과한 어린 민애왕이 반란으로 요즘말로 하면 쿠테타로 신라왕실의 서열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신라 왕족의 정통성을 파괴하고 왕계보를 무력으로 바꿔버린 역모였던 것이다. 이러한 민애왕의 반란에 장보고에게 위탁한 사람이 바로 왕세자였던 김우징이었다. 장보고 덕분에 김우징은 훗날 신무왕이 되었다.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찾아와 신라왕실의 정통성을 되찾아줄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요청을 하면서 김우징은 과거 세자 신분이었던 시절 완도로 유배를 와 천관사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던 곳이다. 과거 세자 시절 유배를 와서 머물렀던 천관사이었고 또한 장보고에게 신라왕실의 정통성을 찾아줄 것을 요청하면서 머물렀던 곳이 바로 천관사였다. 천관사가 바로 장보고의 역사를 바꿔버린 시발점이 된 곳이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천관사이다. 왕관을 쓸 사람을 만들어내는 절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불교계에서는 천관보살을 모셨다고 하여 천관사라 했다고 천관보살은 지장보살의 다른 이름으로 지옥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중생들 모두가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도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보살이 천관보살이다. 

천관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절로서 홍진이 김우징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장보고와의 연결의 선을 댄 것으로 장보고-홍진-김우징으로 신라왕실의 정통성을 되찾자고 의기투합한다. 당시 신라의 불교는 신라지배 귀족들의 명분철학이었다. 

그래서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에 도전하고 또한 지배층의 지배이념으로 불교가 이용되던 시절이었다. 말그대로 귀족불교였다.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왕권에 대응하는 이념으로서 불교가 자리잡으면서 귀족불교로서 골품제라는 제도와 함께 신라의 토대를 만드는 작동원리였다. 불교와 골품제라는 이념과 제도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신라 전체를 관통한다. 장보고에게 있어서 불교는 또 하나의 이념이었다. 기존의 화엄종과는 다른 선종으로 장보고의 청해이념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기존의 지배권력인 왕족과 귀족의 불교와는 상이한 새로운 이념으로 자신의 청해진제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부와 철학적 이념을 갖춘 장보고에게 신라왕족의 정통성 회복을 요청한다. 그것도 왕세자이고 계보의 정통성을 가진 김우징이 직접 찾아와 요청한다. 장보고도 심사숙고 하고 몇 번을 생각했을 것이다. 과연 내가 나서야 할 것인가 하고. 결론은 나서서 신라왕실의 가치체계를 바꾸자고 했다. 이 때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장보고의 딸을 아들과 결혼시키겠다”고 장보고의 가치관에 새로운 희망을 선물한다. 장보고가 결단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신라의 이념과 제도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거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인 절이 천관사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천관사는 초라하다. 절로 접근하는 통행로는 구불구불하고 상당한 높이에 존재한다. 그래서 전망은 좋다. 천관산 정상 봉우리가 바로 눈 앞에 있다. 건물도 간결하고 탑들도 고려시대의 간결미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민애왕의 폭거로부터 신라왕실의 정통성을 되찾자고 장보고와 김우징이 서로 의기투합한, 거사의 시작점이 바로 홍진대사가 있었던 장흥군 관산읍에 있는 천관사이다.

참으로 장엄한 출정이었다. 홍진과 함께 무너져버린 신라왕실의 정통성을 되찾고자 하는 김우징을 추슬러 장보고의 5,000명의 기병이 청해진권역을 출발한다. 839년 추운 겨울의 일이다. 무너져버린 신라왕실를 바로잡기 위하여 김우징을 앞세우고 청해진을 출발한다. 천관사에서 시작된 거사는 이제 경주로 향한다. 당시 관할이었던 무주도독 김양도 합류한다. 무주라 함은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말한다. 당시 무주와 나주를 관할하던 신라왕실 파견의 감독관이었으며, 김양은 김우징의 정통성 회복에 동참하였다.

추운 겨울 2월의 낙동강은 매서웠다. 대구 팔공산 앞에서 신라 민애왕의 10만 대군과 대치했다. 5천 기병으로 10만명의 대군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저히 이길 방안이 없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장보고의 청해진제국도 나아가 김우징의 신라왕실의 재건도, 나아가 김양의 정통성 확립이라는 가치관도 동시에 다 무너지는 것이다. 민애왕은 여유만만했다. 장보고의 5,000 기병을 쉽게 이기리라고 예상했다. 대구 팔공산의 전망 좋은 곳에서 느긋하게 장보고와 김우징, 김양의 군대를 바라보면서 웃을 뿐이었다. 장보고는 쉽게 나갈 수 없었다. 이길 승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낙동강 사문진 나루터를 기점으로 대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의 사문진에서 대치하면서 장보고는 10대군을 이길 전략으로 바로 거사의 명분을 선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까지 백제권역은 쉽게 통과할 수 있었지만 신라권역은 쉽게 전진할 수 없었다. 백성과 군인들의 저항이 있기 때문이다. 신라를 공격하는 세력으로 장보고가 그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보고는 선무 작전을 펼친다. 

“지금 우리는 신라의 정통성 있는 진짜왕(신무왕)을 모시고, 신라 경주를 점령하고 있는 가짜왕을 내쫓으려 가니 모든 사람들은 협조하라”
 장보고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문서를 통해서, 그리고 낙서를 통해서 선무공작을 펼친다. 가짜왕 민애왕에 빌붙어 반역을 저지르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동조한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선무공작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10만 대군은 하루아침에 반으로 줄어들고 수많은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거나 군대에서 이탈하여 도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구 사문진에 동원된 민애왕의 10만 대군은 숫자만 10만이었지 쉽게 강제 차출된 농민과 일반인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들만 빠져나가면 민애왕의 정예군대는 얼마되지 않았다.

낙동강을 건널 배가 없었기에 선무공작으로 한 달여를 대치하다가 드디어 강추위에 낙동강이 얼어붙었다. 장보고의 5,000 기병은 꽁꽁 얼어붙은 대구 사문진 낙동강을 말을 타고 건너 민애왕의 정예대군을 덮쳤다.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민애왕의 병사들은 추풍낙엽마냥 장보고의 기병에 밀렸다.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를 팔공산에서 바라보고 있던 민애왕은 신라 경주로 후퇴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판세는 기울어져 신라권역에서는 민애왕은 가짜왕이고 장보고가 진짜왕을 모시고 신라 경주로 온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진 뒤였다. 신라 사람들도 동요했고 김우징의 진군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거의 무혈입성이었다.

백성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민애왕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민애왕을 호위하던 군사들도 이미 다 도망가 버렸다. 갈 곳을 잃은 민애왕은 장보고에게 잡혀 839년 음력 1월 23일 처형되었다. 신라 천년에서 처음으로 외부세력에 의해 왕이 살해당하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진짜왕이 가짜왕을 몰아내는, 정통성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장보고는 신라의 정통성을 찾아준 신라의 수호자요 신라의 빛이었다.

장보고는 승승장구했다. 신라의 진해장군으로 봉해졌다. 신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수호신이 된 장보고는 위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천관사의 의기투합에서 시작된 진짜왕을 옹립하고 가짜왕을 축출하려는 정통성 확립의 거사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왕에 등극한 김우징 즉 신무왕이 6개월만에 지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장보고는 욕심내지 않았다. 청해진제국을 일으켜 세계의 중심으로 신라를 만드는 일이 먼저였다.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신무왕 옹립 6개월만에 김우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경응이 왕위에 올랐다. 문성왕이다. 장보고는 문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선왕인 신무왕 김우징이 약속한 혼인약조에 대해 지킬 것을 요구했다. 가장 핵심은 바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청해의 이념으로 만들어진 청해진제국의 앞날과도 관련되고 세계 수많은 곳과도 거래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하고 있는 청해진의 위상과도 관련되는 중차대한 문제라 인식했으며, 청해진의 이념구현을 위한 골품제의 개선과 노비제의 폐지와도 관련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점령지인 백제권역은 향, 소, 부곡 등의 노인촌(奴人村)이 대부분이었다. 완도 청해진도 예외는 없었다. 전부가 최하층민이 사는 부곡이었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골품제에 억눌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노예로서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청해진제국의 미래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보고는 선대왕 김우징의 약속이행을 문성왕에게 요구했던 것이고 또한 문성왕도 장보고의 공덕을 알기에 순순히 응할 계획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왕이 주재하는 회의를 열어 공론에 붙였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장보고와 함께 김우징을 옹립하는데 가장 앞장선 김양이었다. 당시 무주도독이라는 청해진관할 행정감독관이었지만 민애왕을 배격하고 김우징을 옹립하자는 대의에 동참하여 장보고와 함께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그야말로 장보고에 못지않는 공신이었다. 장보고 못지 않는 시중(侍中)이라는 위세를 신라 왕실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국무총리역을 하고 있었다.

김양은 장보고의 납비에 대해 강한 반대를 하였다. 신라왕실 출신으로서 지배계층으로서, 귀족으로서, 골품제의 최대수혜자로서 김양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는 문제에 대해 강한 거부감과 함께 “천한 해도인의 딸”이라는 논리로 반대하였다. 장보고와 같이 정통성 있는 왕을 옹립하자는 대의명분으로 뭉친 동지를, 그것도 거사에 성공해서 그렇지 실패했으면 같이 처형되었을 같은 운명의 동반자에게 “천한 해도인”이라는 딱지를 붙여 배격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골품제로 똘똘 뭉친 신라골품제의 최대수혜자인 왕실 귀족의 면모를 그대로 내보여준 것이다. 결국 왕실의 정통성을 해친다는 논리로 장보고의 딸의 납비문제에 반대하면서 문성왕의 왕비로 김양 자신의 딸을 추천하여 결국 김양의 딸이 장보고의 딸 대신 문성왕의 왕비가 되었다.

신라 문성왕의 왕비를 딸로 둔 김양의 위세는 정말 대단하였다. 아무도 김양에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장보고도 동지였고 같이 뜻을 한다고 믿었던 김양으로부터 강한 거부감과 함께 신라골품제의 노비제의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김양의 인식에 강한 좌절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장보고의 이상과 뜻은 골품제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김양의 병부 장악과 사주에 의한 염장의 암살로 장보고에 대한 모욕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완도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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