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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와 적산 법화원Ⅱ(21회)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2.19 10:47
  • 수정 2021.02.1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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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에 따르면 장보고가 법화원을 창건한 목적이 이러한 목적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무역업을 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의 관청에서 발급하는 공험公驗이 꼭 필요하였다.
 이 공험으로 받아들인 수입은 국가의 재정을 충당하였다. 그런 만큼 무역상에게 있어서 세금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원은 면세 혜택을 보는 곳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장보고는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을 세금을 내지 않고 재투자하는 방법으로 법화원을 세우지 않았을까? 하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사찰을 관리하는 책임자가 주지 스님이어야 하는데도 승려가 아닌 민간인이 그것도 장보고 휘하들인 장영, 임대사, 왕훈 등이 관리하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적산법화원은 845년 당나라 무종 때 불교 탄압으로 파손되었으나 1998년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내용을 근거로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0년 5월 개관하였다. 
 적산법화원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987년 1월 일본의 적산법화원연구회 회원들과 오사카 아사히신문이 석도진을 방문하여 ‘중수적산법화원위원회’를 발족하였다.
 다음 해 법화원 복원을 지원하기 위해 재차 방문하여 경내에 16개의 비석을 세웠다. 그중 두 번째로 큰 비석에 “대나무밭 시원한 그늘 아래 엔닌의 옛 절터” 적산법화원이 일본승 엔닌이 창건한 사찰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마치 오늘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뻔뻔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1988년과 1989년 이곳을 방문한 우리나라 김성훈박사 일행이 절의 주인이 엔닌으로 바꿔치기 당한 사실을 발견하고 산둥성 정부를 찾아 신당서, 삼국사기, 엔닌의 일기 등을 보이며 바로 잡아 줄것을 요청하였다. 
 산둥성 정부에서는 이것이 지방 관원의 무지로 인해 생긴 일로서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 일본인들의 비석을 전부 절 경내에서 끌어내고,
 둘째 이를 시정하는 뜻에서 중국 측은 이곳이 장대사의 본원 사찰임을 밝히는 비석을 세우며,
 셋째 비록 외교 관계가 없지만, 한국 측에서 장보고 적산법화원 기념비를 세우도록 허용해 달라고 하였다. 

 산둥성 정부는 이 제안을 모두 받아들여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을 경내에서 다 철거하고 한국 측에서 마련한 ‘장보고 대사 적산 법화원 기념비’를 1990년 2월 3일 세웠다. 
 이 비는 전면에 한글로 후면에는 한문으로 새겼으며, 비문은 장보고 해양경영사 연구회와 중앙대 중국 연구소가 지었고, 글씨는 장전 하남호 선생이 썼으며 이에 드는 자금은 한국선주협회가 지원하였다. 
 이 비석 제막식은 1990년 5월 1일 행하였는데 이때 완도에서 가지고 간 청해진 해안의 청석(靑石)도 함께 봉안하였다. 
 김성훈 박사 일행은 이곳 외에도 산둥성 문등현의 유산포와 강소성의 연운항의 숙성촌에도 장보고 당시 신라인 유적지임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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