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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리 밖 울음소리, 황홀한 신지항일의 흔적임재갑 장석천 등 항일운동가 배출해 낸 신지면
완도신문 | 승인 2021.02.26 10:08

일제 강점기의 전남 완도군의 신지도는 반농반어의 섬으로 인구도 적고 농토도 작았지만 경제적으로 완도에서 평균적인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공립보통학교가 다른 면들에 비해 늦게 세워졌고, 사립학교도 학술강습소 형태로 세워지기는 했지만 당국에 의해 곧 폐쇄되고 말았다.

따라서 신지도 청소년들의 교육 수준은 다른 섬들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몇 건의 항일민족운동이 신지도에서도 일어났다.
우선 1919년 3·1운동 당시에 신지도 출신 차종화는 김우진과 함께 완도 본도에서 완도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이를 준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경찰에 의해 미리 탐지되었고, 결국 두사람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

또 1924년에는 신지학술강습소를 세운 임재갑과 이 강습소에 초빙된 교사 김재희(김정상)은 주민들에게 강습소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순회강연을 하였는데, 그 강연 내용과 이동 중에 학생들이 부른 노래가 문제가 되어 구속되었다. 문제가 된 강연 내용은 조선인의 관대하여 서로를 존중하며, 조선은 오랜 세월 동안 자주독립의 국가를 유지해 왔다는 것이었다. 또 문제가 된 노래는 이른바 ‘혁명가’로 그 가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폭정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검찰 측은 두 사람 외에도 다른 두 명의 교사인 송기호와 김창선도 구속하였는데, 역시 학생들에게 불온한 창가를 가르쳤다는 이유에서였다. 송기호 등이 가르친 노래는 운동가(응원가)로 ‘용맹스런 자유의 깃발을 흔들자’는 취지의 가사를 담고 있었는데, 검찰은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재판에서 임재갑과 김재희는 10월과 1년의 징역을 각각 언도받았던 반면, 송기와 김창선은 무죄를 언도 받았다.

1925년에는 강습소 학생 양양순 등 6명이 신지도 경찰 주재소 앞에 태극기를 세웠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학생들은 주재소의 한 순사가 주민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는 데 불만을 품고 태극기를 세웠다고 한다. 이들은 장홍검사국의 예심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또 1943년에는 황의영이 한 상가에서 잡담 중에 일본은 반드시 전쟁에 패하고, 조선은 독립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양 모라는 사람이 경찰에 밀고하여 체포,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유언비어 유포혐의였는데,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월을 언도받았다.

그 밖에도 1930년대 중반 장흥, 해남, 강진, 영암, 완도 등에서 500여 명이 경찰에 언행되어 조사를 받고 5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된 전남운동협의회 사건과 관련하여 신지도에서도 여러 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지도에서는 협의회의 하부 조직인 농민조합이 조직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연행된 이들도 조사를 받고 모두 석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지도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로는 임재갑과 장석천을 꼽을 수 있다.
입재갑은 신지도의 항일운동을 사실상 이끈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찍이 송내호가 조직한 수의위친계에 참여한 바 있었다. 또 그는 신지학술강습소를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당국이 이를 폐쇄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혁명가 사건으로 인하여 10개월의 옥고를 치러야만 하였다. 그는 시간회 완도지회 지회장으로도 활약하였는데, 그만큼 그는 완도군 전체에서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다.

장석천은 보성고보와 수원농림, 동경상과대학 등을 다닌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로 1926년 광주에서 청년운동에 뛰어들었으며, 1928년 이후 광주의 청년운동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장재성과 함께 11월 12일 학생들의 2차 봉기를 이끌었고, 17일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서울에서 조선청년총동맹, 신간회, 고려공청의 지도자들과 접촉하여, 서울에서 학생들의 시위를 일으키고, 나아가 전국적으로 이를 확산시키기로 의견을 모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서울의 학생 대표들을 접촉하여 여러 학교에서 시위를 일으키도록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경찰에 의해 결국 탐지되었고, 결국 그는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의 지시대로 12월 9일에 서울에서는 여러 학교에서 동시에 시위와 맹휴가 일어났으며, 이후 학생들의 시위와 맹휴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처럼 신도에서는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였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항일 운동 사건이 있었다. 또 임재갑과 장석천과 같은 민족운동가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장선척은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신지도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였으며 우리 모두는 100년 넘게 지내온  3·1운동의 역사에서 10리밖까지 울음소리 들리던 활홍한 신지도의 항일운동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지항일운동기념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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