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鳴梁, 명량해전의 승리가 남긴 후폭풍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3.12 15:28
  • 수정 2021.03.1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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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실에는 그 이유가 존재한다. 이른바 인과관계이다. 더군다나 임진왜란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처참한 전쟁상황에서 통제영을 옮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괜히, 무작정, 이유없이 라는 인과관계 없는 설명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왜 이순신은 완도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겼을까? 1597년 9월 16일 그야말로 이순신의 모든 것을 내쏟아부은 명량해전 이후 조선수군은 그 존재가 없었다.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명량해전은 승리했지만 그 승리는 이순신의 개인의 전술에 의한 것이지 전략적인 승리가 아닌 일회적인 승리였기에 더욱 처참한 후폭풍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명량해전은 그야말로 이순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치룬, 이순신의 개인의 역량과 전술에 의해 이룩해낸 승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3척의 배로 조선수군이 가진 모든 군사력과 군사무기, 화약 및 총통 나아가 모든 것을 걸고 명량해전에 임했던 것이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가진 모든 병력과 무기를 총투입하여 왜구를 격퇴하고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그 후폭풍은 매서웠다. 싸울래야 더 싸울 수 있는 무기도 없었고 병력도 없었고 지원군도 없었고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말뿐인 승리였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또한 그 승리가 널리 퍼져 조선민중들의 삶속으로 퍼져가지 못했다. 일회성 단발성 전투의 승리일 뿐 이순신은 더 이상 왜구들과 싸울 수도 없었다. 무기도 없고 병력도 없고 모든 것을 한 곳에 쏟아부은 결과 마지막 남은 결론은 ‘도망’이었다. 이순신의 도망은 전국토를 피폐하게 했다. 그야말로 왜구들의 발악은 더욱 극성이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둔 이순신이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왜구들의 반격을 피해 도망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명량에서 진 왜구들의 반격과 보복성 분풀이는 그야말로 지옥의 상황을 연출하였다. 당시 이순신의 명량해전 이후 일본으로 잡혀간 영광사람 강항의 기록인 “간양록”에 그대로 남아있다.


왜적은 이미 영광군을 불태우고 산을 수색하고 바다를 훑어 사람들을 도살하므로 나는 밤에 배를 탔다. (중략) 피란하는 배가 모인 것은 거의 백여척이었다. (중략) 이순신은 중과부적으로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략) 배안에 있는 장정이 거의 40여명에 달하니 이순신에게 붙어서 싸우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하는 것이 설사 성공을 못하더라도 떳떳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로 결정, 배가 진월도(현 낙월도)에 이르러 이순신의 배 10여척이 이미 각씨도를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 칠산바다를 건너 올라가게 하였으나 북풍이 너무 세게 불어 배가 올라갈 수 없었다(강항, 1656: 섭란사적).


강항이 전하는 피랍 당시의 상황이다. 이순신의 전술적 승리로 명량해전에서는 승리했으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결과 더 이상 저항하거나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하고 칠산바다를 건너 군산앞바다의 선유도까지 올라간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치루고 난 이후의 왜구들의 보복 준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납치되었다. 또한 코를 베어가서 승리의 전리품으로 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일본 쿄토 대불사의 ‘비총(鼻塚)’이다.


그야말로 왜구들의 보복 악행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이순신도 이 때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명량해전에 대한 보복으로 이순신은 아들까지 잃었다.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당파대립으로 백의종군까지 해야 했던 이순신의 심기로 보면 불편할 수도 있었으나 종묘사직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조선을 구하기 위해 나선 이순신으로서는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전략적 기반하에서 전쟁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이 군사적 정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병사들을 충원하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기와 배를 보완하며 나아가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보급하고 만들어내는 기반이 없으면 무너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과거에는 여수라는 전라좌수영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나 이제는 겨우 배 10여척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피폐해진 조선의 역량상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보급해줄 상황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거친 칠산바다 덕분에 왜구들은 이순신을 더 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 만일 누구나 쉽게 통행할 수 있었다면 이순신은 전멸할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거친 칠산바다를 물길도 모르고 뱃길도 몰라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다. 대신 칠산바다 이남의 바다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이순신은 할 일이 없었다. 왜구들을 격퇴할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사도 무기도 보급도 없는 상황에서 재기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재기의 기반이 되어준 곳이 바로 고금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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