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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가슴은 내가 다 빨아먹어서 빈 껍데기가 되었거나

109살 이월여 엄마와 90살 김종천 아들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1.03.20 10:55
  • 수정 2021.03.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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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세상 모든 곳에 갈 수 없어 '엄마'를 보낸다는 말이 있듯 그러한 엄마와 구십 평생을 함께 살았다.
50년이면 부부의 인연인 것을, 그 부부의 인연을 두배로 살아온 엄마와 아들이다.
아들은 엄마 같았고 엄마는 아들 같았다.
신지면 동촌리에서 오손도손 살고 있는 109살의 이월여 엄마와 90살의 김종천 아들.
이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구순의 아들이 완도읍내에 볼일이 있어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109살의 엄마의 눈빛이 갑자기 침울해진다.
아들을 아예 눈에 담으려는지 아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 눈빛을 읽은 아들이 "꼭 가봐야 한다"니, 다시 엄마의 눈빛은 "가면 언제쯤 오느냐?"
또 그 눈빛을 알아보고 아들이 말한다.
"엄니, 늦어도 네시까지는 돌아오요"
"생산살 발라 놓았으니, 점심 맛나게 드시고 계시시요"


아들이 떠나고, 엄마는 점심때가 한참이 지나 밥수저를 들지만 그게 제대로 들어갈리 없다. 먹는 둥 마는 둥, 어느 새 3시가 돼 간다. 벽에 붙은 시계를 얼마나 자주 봤는지 모른다. 온다던 4시가 돼 가자, 조금씩 불안해지면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4시 반이 되고 5시가 돼 가는데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그때 엄마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얹힌 듯 숨이 제대로 안쉬어진다. 아들은 다섯 시 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여섯시가 되었는 데도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엄마의 가슴엔 이미 태산이 올려진듯하다.


이때부터 엄마는 아들이 왜 안 돌아올까, 읍내 자동차에 다쳤는가! 아니면 배를 탄 배가 난파되지는않았을까, 술이 취하여 남과 다투다 사고는 나지 않았을까!
 오만가지 생각에 엄마는 안절부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불안과 걱정으로 견딜 수가 없다.
저녁 7시가 넘어서자,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듯 걸을 수 없는 발이 엄마 일으킨다.
엉금엉금, 마을 앞까지 나간다.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는다.
더 멀리까지 바라보려면 높은 곳을 올라가야 한다. 마을 앞 소나무가 서 있다.
나무 위를 올라가는 위험 따윈 할 겨를이 없다. 떨어질까하는 무서움 따윈 기억에도 없다. 그 위험한 곳을, 그 무서운 곳을 기어이 올라가 우리 아들이 어디쯤오는가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
그 정성스러운 광경이 엄마라는 이름이고, 그 나무 위에 올라가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갸륵한 마음이 엄마의 마음.


109살의 이월여 엄마, 마을 앞 큰 소나무를 빼곤 이 마을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
마을 어르신에게 물었더니, 골목 끝 가장 윗집이란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엔 봄쑥 향이 은은하게 전해지는데, 봄쑥 캐는 엄마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시처럼 살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먼 곳에서 찾지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과 귀하게 지내라"고.
그런 생각에 집에 이르니, 토방 위에는 낯선 방문객을 물끄러미 맞이하는 이월여 엄마가 앉아 있다.


엄마의 손부터 눈길이 갔다. 엄마의 무딘 손마디는 피어나는 쑥꽃처럼 한없이 정이 깊어 보였다. 그 쑥꽃같은 손에 햇살이 내려 앉고 봄바람이 지나가자 반짝반짝 별이 되어 반짝인다. 엄마의 가장 깊은 곳에 가장 부드럽게 빛나는 마음인양.
구십의 아들은 2살 때 엄마의 손을 잡고 신지면 동촌리로 왔다고 했다.
엄마는 현재 활동을 제대로 못하지만 밥도 잘 드시고 건강한 편이라고 했고, 아들이 밖에 나가면 올 때까지 걱정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했다.
아들의 자녀들은 두산그룹과 검찰청에 다니고 있고 손자손녀들도 공무원과 농협중앙회에 다니며 큰 걱정이 없다고 했다.


젊어서는 진보적인 사상 때문에 연좌제가 폐지될 때까지 고초가 많았었다고.
또 마을에는 악한 사람이 없어 우애가 깊기로 소문난 마을이라고 전했고, 몸이 힘들어서 엄마를 잘 모시지 못해 현재는 청산에 사는 여동생이 찾아와 엄마의 음식이며 집안 살림을 해줘서 조금 편하다고 했다.


주위의 말을 들어봤더니, 아들은 삼십대 젊은 나이에 부인과 사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강인한 생활력을 바탕으로 4남매를 곧고 바르게 키우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살펴왔다고.
1995년 부친이 노환으로 별세하고, 자녀들을 출가시킨 이후에도 아들의 모든 삶은 오롯이 어머니를 향해 있었는데, 80대 중반3번의 수술과 12번의 항암치료를 받으며 병마와 싸우면서도 노모가 걱정할까봐 투병사실까지 숨긴 채 효행을 실천해 주위 사람들을 모두 감동케 했단다. 나이 탓에 거동이 불편해 집밖을 벗어날 수 없어 아들도 병원 치료 외에는 외출도 거의 못하면서 본인의 삶보다는 엄마를 봉양하는데 모든 것을 받치고 있어 더욱 감동을 주고 있다.


신지면장 재임 당시 아들의 효행을 널리 알렸던 이송현 의회사무과장은 “김 할아버지는 진실한 효심으로 노모가 장수를 누릴 수 있도록 실천한 참효행은 타의 귀감이 되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자식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다”며 “거룩한 희생과 효행을 널리 알려 따뜻하고 아름다운 지역사회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교훈으로 삼고자 효행상패를 수여하게 되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 사람이 90년을 살기도 어려운데, 두 사람이 함께 90년을 함께한 사이라면 이것은 몇 생애를 합쳐서 한 번의 생을 산 것이다.


아들의 지극한 효행만큼이나 아들을 기다리는 엄마의 기다림 또한 지극했을 터. 모시는 것은 쉬운 것이고 어려운 건 기다리는 일인 것이며, 궁극의 어려움이란 기다림의 끝에 이른 길. 그 끝이 보이지 않고 그 결말이 불확실해 그 기다림을 엄마는 백년 넘게 해왔으니, 엄마의 삶이 오래 살아 여한도 없겠지만 참으로 기구하기만하다.
눈에 뜨이게 아름답지 않은 쑥꽃 옆에서 쓰디쓴 인내와 고통을 겪어야만 자식에게 줄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걸 잊지 않은 엄마. 실꾸리처럼 자식에게 줄 것이 한없이 나왔다는 백년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러야 했을까.


아들에게 "어머니를 잘 보살핀 효자시네요!" 했더니, 아들은 "아니요! 주위에선 내가 지금껏 엄마를 돌보고 있는 줄 알지만, 내가 잠이 들어 일어날 때까지 엄마가 3번씩 내 방문을 들여다봐요. 우리 아들 잘 자고 있는가하고"
그러며 "엄마의 가슴은 내가 다 빨아먹어 빈껍데기가 되었거나 아님 까맣게 타버려 재가 되어 그것도 바람에 모두 날아가 버리지 않았을까. 나를 위한 일이라면..."

어떻게 당신인지 알 수 있을까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으로
당신만 올 수 있다면...
당신이 올 수만 있다면
나는 당신을 알아봅니다

몇 세기가 흐른다해도
몇 생애가 바뀐다할지라도
당신이 오신다면
나는 당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상의 바람으로
우주의 먼지 사이로
내 이름을 부르는
당신의 목소리는
충돌과 생성을 통해
별빛의 파동으로 울려 퍼지고 있기에

언제, 어디에서든
당신만 오신다면
그 날, 그때로 날 데려가는
당신의 이름을 너무 그리워함으로....

김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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