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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 전략적 거점으로써 완도 고금도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3.20 11:03
  • 수정 2021.03.2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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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의 결과 엄청난 후폭풍에 직면한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왜구들의 반격을 피해 칠산바다를 건너 서해 군산앞바다 선유도까지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명량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결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전혀 남아있질 않았다. 무기없이 보급없이 싸울 수는 없었던 것이고 이순신의 패배는 바로 조선수군의 궤멸과 직결되는 아주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칠산바다 앞까지 추격한 왜구들이 거센 칠산바다를 건너지 못해 더 이상 이순신을 추격하지 못하게 되자 이순신은 다시 남하하여 목포 앞바다 보화도(현 고하도)에 진을 치게 된다.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과 물자의 보급이 시급한 때였다.


또한 추운 겨울에 맞아 활동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일본의 반격을 받게 되면 조선수군 전체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백의종군 이전에는 여수 좌수영이 전략적 거점 역할을 하였지만 명량해전 이후에는 거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쉽사리 여수를 탈환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구를 격퇴할 수 있는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아무리 명장이라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순신으로서는 하루빨리 전략적 거점을 구축해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완도 고금도이다.
왜 고금도를 전략적 거점으로 선택했을까? 이순신도 명장이고 또한 뛰어난 전략전술가이다. 아무런 이유없이 고금도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 이후 고금도 통제영을 중심으로 대본영을 형성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도 고금도 대본영에 대해서 인정하고 임진왜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위대한 두 장군 이순신과 진린이 선택한 고금도 대본영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위대한 두 전술전략가들이 고금도가 적절하지 않았다면 의기투합하여 연합수군을 형성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새로운 지역을 선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과 진린 두 장군은 고금도를 선택하여 7년간의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먼저 이순신이 고금도를 선택한 기록을 보자. 조선왕조실록 선조31년(1598) 3월 18일 기록이다.
2월 16일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보화도에서 바다로 나아가 17일에 강진 경내의 고금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고금도 역시 호남 좌우도의 내외양을 제어할 수 있는 요충지로 산봉우리가 중첩되어 있고 후망이 있대어져 있어 형세가 한산도보다 배나 좋습니다. 남쪽에는 신지도가 있고 동쪽에는 조약도가 있으며 농장도 역시 많고 한잡인도 거의 1천 5백여호나 되기에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이순신이 고금도를 통제영으로 선택한 이유이다. 현재 기록에 나와 있는 이유를 가지고 이순신은 선조에게 통제영을 고금도로 하였음을 보고한다. 첫 번째가 여수를 중심으로 한 좌수영의 전진기지였던 한산도보다 배나 더 전략적 거점으로 하기에는 좋다고 평하고 있다. 요충지이기 때문이라 하였고 군사적 식량의 보급이 용이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조선 조정에서 식량 및 무기의 보급이 없이도 충분한 여력을 가지고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 대해 “난중잡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이 고금도에 유진하니 피난하는 뱃사람들이 모두 모여 들어 한 달도 못되어 한산진(閑山鎭)과 같았다.


강항의 ‘간양록’에 기록된 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을 따랐다. 이순신을 따르면 왜구의 살육을 피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퍼졌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전쟁승리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이 좋아졌고 나아가 그만큼 보급물자 및 식량, 군사의 충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고금도는 더욱 이순신에게 활력을 주었을 것이다. 바로 중요한 것이 수군의 충원이다.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군사로 보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이순신에게는 필요했을 것이다.
조총을 가진 왜구들은 병력충원이 쉬웠다. 몇 시간의 간단한 총기 교육만 실시하고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군사력 충원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그러지 못했다. 첫째 물길과 뱃길을 알아야 했고 또한 바다에 익숙해 배멀미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점 때문에 당시에 배로만 통행할 수 있는 섬이었던 고금도를 택했을 것이다. 고금도를 찾아오는 사람은 당연히 일종의 예비시험을 합격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총과 달리 활은 수많은 시간의 수련기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활을 잘 쏠 수 있는 군사를 단시간에 길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총통 즉 대포의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즉 화약과 대포의 보급이 용이한 곳, 군사무기를 쉽게 보급받을 수 있는 곳을 선정하는 것이 가장 먼저였을 것이다. 그것이 어딜까? 바로 완도 무기제조와 연계된 고금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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