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에세이/다시, 봄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3.20 11:06
  • 수정 2021.03.20 11:07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봄의 시작과 끝은 늘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수채화 한 폭에 일상이 스며드는 곳, 푸른 숨이 일렁이고 청명한 바다에 길게 포말을 그리며 시린 겨울이 부서지는 거기.
내 유년의 놀이터 그곳에서 진달래가 날아든다. 바다 향기 가득 담은 연분홍 소식이다. 겨울의 철거반들이 오래전 풀어놓은 등짐을 둘러메고 선착장을 떠났다고 한다. 남쪽에서 건너오는 남실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며 넌지시 귀띔을 해준다.
"하루에 한 뼘쯤 자라는 청보리가 봄볕을 갈아 마셔요."
"너울거리며 춤을 추기도 하네요."


익명의 발신자가 보내온 소식이 땅으로 스며든다. 이스트 첨가한 밀가루 반죽 부풀듯 움이 동토를 밀어 올리고, 겨울이 잉태하고 있던 생명이 만삭이다. 시절이 태동을 시작하며 체온을 끌어 올리는 걸 보니 순산이 머지않았다.
굳은살 박인 가지마다 물관을 녹이며 새순이 꿈틀거리고,
감춰두고 있던 처녀막이 벗겨지듯 봄물 가득 품고 있던 꽃눈이 열리기 시작했다. 겨우내 돌돌 말고 있던 솜이불은 박주가리 꽃씨처럼 날개를 달고, 한 꺼풀 한 꺼풀 햇살 속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어제보다 가벼워진 걸음은 연노랑 음계를 타고 봄의 화동들과 유희하며 산책로마다 신춘의 음표를 파종하고 다닌다.


다시 봄, 오래 전 떠난 엄마를 불러 보고 싶다. 삼베보자기로 여며 시렁에 올려놓고 풀어내지 못한 속울음, 손톱 밑을 아주 오래도록 파고드는 탱자 가시 같은 그리움을 봄이라서, 모든 게 다시 살아날 것 같은 계절이라 불러 보고 싶다. 혹여, 차갑게 식어 사그랑이 된 몸이 싹 틔워 나를 힘껏 보듬어 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손짓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내게로 찾아오는 봄처럼 그렇게 눈앞에 다시 한 번 구겨진 입술을 벌려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내 그리움의 시작점은 늘 남쪽이다. 엄마가 연분홍 꽃 더미 속에 얼굴을 파묻으며 웃어주던 순간, 당신 모습이 꽃보다 예쁜 소녀였다는 걸 알고는 있었을는지, 춘풍과 함께 밀려드는 밭일이 지천에 널브러지고, 밭이랑은 붉은 속살을 뒤집어 보이며 씨앗을 뿌려 달라 농성하는 절기지만, 엄마는 필히 먼저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았다. 마당을 빌려 만든 작은 화단에 오일장에서 사 온 봄꽃을 심었다. 담장 아래로는 개화 시기 나눠가며 씨앗을 뿌리고 정성을 들였다. 그렇게 한 철을 가꾸어 놓으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고개 내미는 꽃들에게 삶의 고단함을 위로받으며 살아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작은 행복으로 사는 법을 알려줬던 엄마의 입가엔 낮은 신음과 미소가 적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고단한 날들이 봄볕처럼 쏟아져 내렸던 시절, 그 닦달 맞은 농사일을 달래주는 건 시절뿐이었던 것처럼 오롯이 따듯해져 오는 계절에 녹아들고 있던 살굿빛 안색이 그립고 그립다. 잔설 속에 붉디붉은 동백을 묻고 서운해 할 틈도 없이 연분홍 살구꽃 가지를 뚝뚝 끊어 두 홉짜리 소주병에 곱게 단장시키며 안방까지 봄을 나르던 여인의 미소처럼 화사했던 날들이 지금은 주인을 잃고 내게로 온다.


봄바람이 장바구니 들고 마트 가는 아줌마의 발걸음을 감고 기억의 회로를 뒤적거린다. 잠시 장보기를 미뤄두고 새로 난 길을 염탐하듯 기억을 따라 걸어갔다. 봄이 가장 먼저 당도하는 땅끝마을 추녀에 대롱대롱 걸려있던 고드름이 녹아내릴 즈음 쨍쨍한 꼬맹이들의 웃음소리가 도랑을 흐르며 온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장갑 벗어던진 코흘리개들의 발걸음은 구름보다 가볍게 날아올랐다 마구간을 뚫고 나오는 일소의 울음소리도 한층 우람해졌던 고향의 봄이 눈앞으로 아련하게 밀고 들어온다. 작은 마을을 흔들어대며 올라온 노란 움들이 웅크린 마음을 차츰차츰 이완시켰던 그리운 곳.


더 늦기 전에, 연두저고리에 노랑치마 걸치고 월담하는 개나리 처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봄 마중을 해야겠다. 애너멜 구두 신고 또각또각 햇살 속으로 들어간다. 지난 연말에 새로 단장한 보도블록 틈을 비집고 민들레가 새초롬한 얼굴을 내밀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햇살을 주워 담고 있는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내 고향보다 북쪽인 여기에 해넘이때 그림자 늘어나듯, 쭉쭉 밀고 올라오는 봄의 보폭도 빨라졌다. 내 마음도 숨겨 놓은 날개를 펼치고 햇살 따라 자리를 옮긴다. 지나는 행인에게 쿵쿵 심장이 나대는 소리를 들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봄을 어쩌면 좋을까나!

 

김지민/수필가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