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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의 죽음 앞에 왜 고금도는 없었나
완도신문 | 승인 2021.04.03 09:29

임진왜란이라는 7년전쟁을 끝나게 한 전략적 거점으로서 완도 고금도는 위치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방치된 듯한 느낌이다. 아무 것도 없다. 황량하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역사의 산실인데 너무나 방치한 것 같다. 전라도라서 그럴까? 아니면 전라도 이순신과 경상도 이순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완도를 방치하고 있는 현실에 과연 역사를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이 진실된 사람들일까 의문을 갖게 한다.
완도는 그야말로 임진왜란의 모든 것이었다. 완도가 없었으면 이 나라는 없었을 것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약무호남 시무국가'가 아니라 '약무완도 시무국가'가 성립하는 것이다. 완도가 가진 전략적 가치가 충분한데도 그에 걸맞는 역사적 평가는 내려지지 않고 있다. 기록이 부족하다는 이유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단 한 마디도 고금도라는 기록이 없다. 아쉬운 부분이다. 왜 이순신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이순신은 고금도를 전략적 발판으로 삼아 임진왜란을 종식시켰다. 명나라 수군도독이자 조명연합수군 총사령관이었던 상관 진린도독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으면서까지 끝까지 왜구소탕을 주장하면서 노량에서 전사한 위대한 우리의 영웅 이순신의 죽음 앞에서 고금도는 없었던 것일까?


1598년 11월 19일 고금도 조명연합수군 대본영에서 출발한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왜구와의 7년전쟁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아직도 아니 오늘도 토착왜구라고 하면서 왜구와 전쟁중인 현실이다. 과연 토착왜구는 허상이고 망령일까? 존재하지 않는 유령을 붙잡고 싸우는 오늘일까? 이순신이 전사하고 그 이후의 과정을 보면서 많은 감회를 느끼게 만든다.
이순신은 전사했다. 아니 아직도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도 고금도의 현실을 보면 그렇다. 7년간의 왜구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에게 보낸 선조의 전승축하문[陳都督前賀帖]이 가슴을 찌른다. 조선왕조실록 선조31년 12월 8일이다.

 

왜적의 환란의 생긴 이래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도깨비나 귀신으로 여기며 감히 그들의 예봉을 조금도 대적하지 못하였습니다. 절하께서 ‘나는 맹세코 이 적들과 함께 살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자 우리나라의 장수들이 비로소 힘껏 싸우다가 죽는 것이 영광인 줄 알게 되었으니, 이는 절하께서 한번 싸워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감히 싸우려는 기세를 앞장 서서 돋운 것입니다.

 

이순신의 죽음에도 이순신은 없다. 오로지 중국만 보일 뿐이다. 재조지은이라면서 명나라만 보고 있는 글이다. 이순신이 죽었어도 이순신에 대한 예의는 전혀 없다. 걱정하는 것은 조선수군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약하여 강한 적을 대적할 수 없어 군사를 잃고 국토가 줄어들었습니다. 종묘사직은 잿더미가 되고 대궐은 빈터가 되었으며 심지어 선왕의 묘가 파헤쳐지는 차마 말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중략) 귀신도 외로운 처지가 되어 제사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순신이 전사하고 임진왜란을 끝낸 노량해전의 결말의 말이다. 물론 진린에게 보낸 축하문이니 진린의 입맛에 맞게 써야 하나 죽도록 싸운 완도 고금도에서 출전한 조선수군에 대한 위로나 혹은 이순신에 대한 애통한 심정의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이순신은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조선 조정을 지키기 위해 죽도록 싸운 조선의 백성들은 없는 것이었을까? 역시 그러한 시각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순신의 장례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31년(1598) 12월 11일의 기록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아무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등 총병(鄧摠兵)의 치제관(致祭官)은 이미 차출하였으니 곧 내려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듣건대 이순신(李舜臣)의 상구(喪柩)가 이미 전사한 곳에서 출발하여 아산(牙山)의 장지(葬地)에 도착할 예정으로, 등 총병의 상구와 한 곳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치제하는 차례에 있어 서로 구애되지 않을 듯하므로 본조의 낭청을 먼저 보냈습니다. 이축(李軸)을 오늘 내일 사이에 재촉해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禮曹啓曰: "云云事傳敎矣。 鄧緫兵致祭官則已爲差出, 近當下去, 而聞李舜臣喪柩,. 已離身死之地, 將到牙山葬所, 不與鄧喪, 同在一處云。 致祭先後, 似不相妨, 故曹郞廳先爲發送矣。 李軸, 今明日內, 催促下送何如?"

 

하니, 전교하기를,
“중국 장수를 먼저 제사하고 다음에 우리나라 장수를 제사하는 것이 예의상 옳을 것이다. 상구가 한 곳에 있다 하여 선후의 절차를 따지고, 각기 다른 곳에 있다 하여 중국인이 우리가 하는 모를 것이라 여겨 우리나라 장수를 먼저 제사하려고 하는 것은 도리상 온당치 못한 듯 싶다. 등 총병에 대한 치제관을 속히 먼저 보내도록 하라.”
傳曰: "先祭天將, 而次祭我國之將, 於禮爲得。 同在一處, 則致其先後之節, 而各在他處, 則謂唐人不我知, 而欲先祭我國之將, 恐於理未穩。 鄧揔兵祭官, 斯速先送。"

이상과 같은 선조임금의 전교가 내려진다. 이른바 <장례지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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