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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몸의 등불은 너의 눈이라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리니,

독립유공자의 아들과 며느리, 고금면 조장원 아버지와 김정례 엄마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1.04.09 10:49
  • 수정 2021.04.0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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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직전에 엄마의 편지를 받았다. 엄마는 말하길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천하에 자식에게 죽으라는 엄마가 어디 있겠랴만 혹여나 자식의 의지가 약해질까봐, 수의 한 벌을 보내며 죽음을 앞둔 안 의사의 면회조차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당차고 의기로운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는 없었던 참 훌륭한 엄마와 아들. 

 그들의 의기로운 삶으로 우리가 있음이니, 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 일인가!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금면 독립유공자의 후손인 조장원 아버지와 김정례 엄마의 이야기 속으로..

 허기짐을 밥 먹듯이 하고 있으니 그는 내 몸에서 떼낼 수 없는 형제였고, 단 한시도 북풍한설을 피할 수 없었으니 그는 나의 정겨운 집이었다.

 세상에 쉬운 것이 이름을 날리며 살아가는 것.

 어려운 것은 내가 당신에게로 가 끝없이 빛이 새어나오는 캄캄한 동굴이 되어 주는 것이요, 만개의 별이 빛날 수 있도록 어두운 밤하늘이 되어 주는 것, 어떤 이름도 남김없이...
혁명가의 며느리로 살아가는 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어제만 하더라도 그토록 우아했건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꽃잎은 왜 이리도 처참하게 짓이겨졌을까!

 잘 드는 칼날에 아가의 발바닥이 난도질 된 것처럼.
 아장아장 걸어가길 한없이 빌었을 것이다.

 발바닥으로 발바닥으로 하얗게 걸어다니는 꽃잎을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하얀 목련이 지는 날이면 간밤에 시아버지가 자신들이 잘 사나 못 사나 보고 갔노라고 생각했다는 김정례 엄마.

 떨어진 꽃잎을 보고나면, 일제강점기 차가운 감옥소에서 분투하던 시아버지가 떠오른다고. 시아버지인 조동선 독립유공자는 기독교 전파자인 조치연 장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했다.
“아버님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공리적 희생을 하셨던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던 분이지라”
“우리 민족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세워나갈 수 있도록 악압과 폭압, 그리고 불의에 정면으로 맞선 양반이셨지요”

 고향에서 보통사립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경신학교 3학년 때 일본 선생의 배척으로 퇴학을 당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임명관 대학교 전문부 경제과 야학을 다니다가 학비 부족으로 결국은 중퇴, 1930년 한국으로 건너와 농민운동에 가입하여 치안유지법으로 위반되어 대구 이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출옥 후엔 일제에 맞서 비밀 항일운동을 하다 끝내 돌아가셨다고 했다.

 시아버지 조동선 선생은 군외면 신학리 야학교를 설치하고 1931년 완도군 농민운동 전개와 소작료 쟁의 어업조합폐지 운동 젊은 시절을 보냈다. 

 시아버지는 참새가 내려앉은 나락들판 안에는 해바라기처럼 둥그렇게 잠든 물뱀도 있고, 길 잃은 노루가 내려와 숨기도 하는데, 농민은 대지를 지키는 사람이고 어민은 바다를 보호하는 사람,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대지와 바다에 비해 빚더미에 쓰러진 농어민들이 너무 참혹한 삶이라서, 그 가난한 이들이 조금이라도 품위 있게 살도록 돕는 것,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길, 그것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당신의 말씀, 그걸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몸이 멀어지면서 마음까지 멀어지는 법이라고 했단다. 시아버지 조동선 선생의 공적은 뒤늦게 알려져 1987년에 이르러서야 대통령 표창과 1990년 애족장을 받게됐다고. 정례 엄마의 남편은 고금지역에 토박이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조장원(88세) 아버지.

 호부에 무견자(虎父無犬子)라 했다.
 호랑이가 호랑이를 낳듯 조장원 아버지도 어릴 때부터 선친에게서 듣고 배워 독립유공자 가족의 오랜 한 맺힌 환을 풀기 위해 고금도 충혼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며 초대 회장으로 부임했다.

 추진위원회는 광주지방보훈청과 완도군을 수차례 방문하고 완도군청에 약산 등 완도동부권역에 충혼탑 건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끊임없이 건의했다고.

 그리해 고금면 도남리 860번지에 일원에 2016년 11월 11일 사업비 1천 8백만 원을 투입해 현재 고금에서 약산으로 넘어가는 도로 옆에 9층 화강암 석탑과 노민상, 와비 등을 조성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고금면 청용 용지포 공유수면을 매립하게 됐을 때, 그 허가에 대항하기 위해 용지포 투쟁 동맹을 조직해 끝까지 막아냈는데, 이는 주민이 함께 단결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저력과 자신감을 보여준 큰 사건이었다고.

 조장원 아버지는 "매년 11월이면 조국을 위해 온갖 고초와 선현들의 민족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가족 등 군민들이 동참해 충혼탑을 바라보면서 헌화 분향은 물론 대한독립 만세 삼창을 힘차게 외쳐 다시는 이 땅에 나라 잃은 설움을 두 번 다시는 겪지 않도록 애국애족 정신을 함양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이 땅에 세운 원초의 과정과 나와 너,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 그리고 나와 너, 우리의 얼을 찾고자하는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운명적 필연, 그 운명적 필연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탐구하며 몸과 혼을 갖추어 나아가 비로소 지역의 정체성을 정립한다"고 전했다.

 더불어 "역사가 현재의 시간과 만나면 같은 맥락과 방향으로 힘을 얻게 되는데, 그것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목표와 가치가 드러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걸어가야할 발자취, 그 궤적을 다른 말로 하면 숨결이다"고.

 선친이 독립유공자로 활동하는 바람에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는데, 슬하엔 2남 2녀로 현재는 하나같이 도타운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부부는 자식 뒷바라지와 생계를 위해 험준한 바다를 여객선에 몸을 싣고 약산과 금일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번 오일장을 찾아 힘들고 무거운 보따리 장사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왔다고 했다.

 그러한 노력 끝에 장남은 멀리 캐나다에서 소형 마트를 경영해 이제는 자리를 잡고 부모의 은덕을 기리고 있다고. 조장원 아버지는 6.25 참전 유공자로 한국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북한군과 사활을 건 격렬한 전투 속에서도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러한 공훈으로 국가보훈처는 6.25 참전 유공자의 희생에 감사를 전하고 이들의 명예를 고양키 위해 생존 6.25 참전 유공자에게 호국영웅 기장종을 수여했는데 먼 거리라서 참석이 어려워 이를 안타깝게 여겨 고금면장의 긴밀한 협조로 회의실에 장소를 마련하고 50여 명의 호칭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기장종을 전수할 땐 함께한 이들과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조장원 아버지는 아직도 “전우여 잘 자라” 노병의 군가 소리가 멀리 북한 땅 중부 전선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데, 지하에 묻혀 있을 장병들의 뼈라도 이제는 가족 품의 돌아올 수 있었으면 한다고.

 현재까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힘든 어려운 가정을 위해 불우이웃돕기 성금 지원, 고금고등학교 불우학생 장학금 전달, 불우어른 신 중식 봉사 등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나눔과 배려로 착한 선교 활동으로 보편적 복지공동체 구현에 앞장서고 있는 조장원 아버지.
언제까지 활동할 것인가요? 여쭸더니, 조장원 아버지는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며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

 

 특집 완도, 아름다운기도 엄마는 <천지가 전복 박경남 대표이사>의 취재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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