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9년 1월 11일 진린 도독은 이순신의 장례식을 엄수했다. 그리고 등자룡의 유해와 이순신의 유해를 임시안치했던 월송대에서 파서 서울과 아산으로 각각 향한다. 등자룡은 선조 임금의 참석하에 1599년 2월 8일 장례식을 치루고 유해는 명나라 군대와 함께 명나라로 건너가 중국에 묻힌다.
서울에서 선조와의 만남과 명나라 군대의 출발 일정 때문에 이순신의 유해를 직접 가지고 아산으로 가지 못하고 대신 처남인 두사충에게 장례를 부탁하고 지금으로 치자면 5천만원 상당의 백금(白金數百兩)을 부조한다. 두사충은 매형인 진린의 뜻을 받들어 이순신의 유해를 모시고 아산으로 가서 묘자리를 잡아주고 직접 장례를 주관한다. 이순신과 두사충은 이미 만나 회포를 푼 적도 있으며 두사충을 위해 이순신은 ‘奉呈杜僕射’라는 시까지 지어준 적이 있다.
北去同甘苦 東來共死生 城南他夜月 今日一杯情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같이 했고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 했네/ 성곽 남쪽 타향의 달밤 아래에서 오늘은 한 잔 술로 정을 나누세
이순신과 두사충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두사충이 직접 묘자리를 잡아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산정마을 뒤 금성산에 장사되었으며 16년 뒤 1614년 지금의 묘역인 어라산으로 이장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충무공의 7대손이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인수(李仁秀, 1737~1813)가 두사충을 위한 신도비문(募明齋 神道碑文)을 쓰기도 했으며 이 신도비문 “우리 선조의 묏자리를 길지에 잡아주었으니...” 하면서 두사충이 충무공 이순신의 묘자리를 잡아준데 대하여 후손으로서 감사함을 표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으킨 1592년 왜구의 전쟁명분은 ‘정명가도’였고, 1910년 한일합방 즉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것은 ‘대동아공영’의 논리였다.
이러한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의 공통점은 반중친일(反中親日)을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 명나라 진린과 이순신이 손을 잡고 왜구를 물리친 것도 왜구들이 요구한 반중친일을 거부한 것이었고, 일제강점기도 바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반중친일의 논리를 거부한 것이었다. 한반도를 가장 많이 침략한 일본이 내세운 논리는 집요하리만큼 반중친일이다. 침략의 합리화를 반중친일에서 찾고자 하는 일본의 논리는 배격해야 한다. 특히나 일본과 전쟁을 벌린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가 남긴 후유증으로 무조건 반일을 주장하거나 반중을 외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을 방기하는 것이다. 반중반일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는 것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역사인 것이다.
고금도가 가진 이제까지의 최고의 역사가 바로 조명연합수군의 대본영이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순신이 이룩해낸 역전의 발판이 되었던 고금도 그러나 지금의 고금도는 없다. 이순신이 없는 고금도는 생각할 수가 없는데 고금도 없는 이순신은 여전히 우리 속에는 존재하는 것 같다. 역사는 흐른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사실들이 존재한다. 기록되어야만 사실이고 기록되지 않았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역사의 해석이 중요하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지만 인과관계에 맞게 역사를 해석하여 교훈으로 삼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완도 고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의 소소한 기록에 대수롭지 않게 실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완도 고금도에 조선삼도수군 통제영을 차리고 중국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조명연합수군 대본영을 설치하였다. 조선을 구한 위대한 두 장수가 아무런 이유없이 아무렇게나 고금도에 본영을 설치하고 고금도를 거점으로 왜구를 격퇴하여 7년에 걸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을까? 고금도가 가진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활용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역사에 맞는 해석일 것이다.
전라좌수영 여수를 빼앗기고 왜구를 피해 조심스럽게 전투해야 하는 현실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그야말로 암담했을 것이다. 아무리 물길과 뱃길을 잘 안다고 하여도 전쟁무기와 군수보급이 없이 왜구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나 전쟁무기의 주력인 대포와 화약의 보급은 그야말로 생명선이었을 것이다. 조선수군의 특성상 노련한 군사를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 숙련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그래서 완도를 택했다. 가리포상 대장군전과 가리포상 이혈총통이 그것을 말해준다. 쉽게 병사를 구할 수도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해결책은 최신식 고급무기로 새롭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것의 최적지인 고금도에서 군수보급과 병기보급을 이루었기에 고금도를 발판으로 순천과 남해, 즉 노량해전에 출전하여 왜란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이순신의 의지와 이순신의 전술만으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나아가 이순신의 해군경력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의 7년이 전부이다.
제53대 가리포첨사를 시작으로 1598년 11월 19일 고금도에서 출전하여 남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여 고금도로 다시 돌아와 80여일을 머물다가 떠나간 것이 이순신의 해군경력의 전부이다. 이 짧다면 짧은 7년의 기간 동안 이순신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바로 이순신의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을 활용하는 리더쉽에 기인하다고 본다. 인적자원이라면 물길과 뱃길을 알고, 활과 칼이라는 전통적 숙련병사를 필요로 하는 자원이 아니라 대포와 신무기로 왜구를 격퇴하는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통해 왜구를 대했던 것이다. 만일 활과 칼로 왜구를 대하려 했다면 이순신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최대한으로 대포와 미사일, 총포류를 개발하여 새로운 화약과 함께 전쟁의 새로운 장을 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완도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 것이다. 풍부한 인력 즉 뱃사람들이 존재했기에 이순신의 전술의 가치가 빛을 발한 것이다.
완도 고금도는 전략적 거점 역할을 분명하게 해냈다. 진린과 이순신이 전략적 거점으로 삼았던 위대한 역사를 가진 고금도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고금도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고금도 없이는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고 이순신이 없는 고금도는 생각할 수 없다..
완도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