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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정지승의 완도, 어디까지 가봤니?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4.16 09:36
  • 수정 2022.01.0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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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문화 탐방기획 완도 <薪智島 ②>

편잡자 주> 본 섹션에서는 완도의 섬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섬 문화탐방 “완도, 어디까지 가봤니?”를 기획연재 하고자 한다. 완도의 권역별 섬의 역사와 문화,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관광자원을 발굴하여 “완도, 어디까지 보았나?”라는 질문을 스스럼없이 던지며, 우리가 알고 있는 완도는 과연 어떤 모습인지, 무엇이 진짜 완도인지를, 완도가 품고 있는 모든 것을 독자에게 생생한 소식으로 전하고자 기획됐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원교 이광사가 신지도에 도착해서 남긴 유배지에서의 감회를 <영회>라는 시에 적어 놓았다. 왕가의 후손이던 원교의 가족사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아들도 뒤주에 가두어 숨지게 한 영조시대 아니던가. 소론을 배척하던 영조정권에 불만을 품은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된 누명이 씌워졌으니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천행이었다.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문을 듣고 자결한 둘째 부인을 두고 떠난 유배길. 함경도 부령(富寧)에서 맞이한 부인의 첫 제삿날 하루 종일 들녘을 거닐다 온 원교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지.


그의 학식을 듣고 찾아 온 유배지에서 주변 사람들은 원교를 따르고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세상을 미혹시킨다는 상소로 인해 진도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신지도로 유배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원교는 차마 죽지 못한 심정으로 형색은 참혹할 지경이었다.

그 당시 3000리 유배 보내는 것은 명나라 극형의 유배 방법인데, 조선은 거리가 좁아 섬을 한 개 지나면 천리를 적용해 고금도를 지나 신지도에 이르는 것을 절해고도의 유배지로 쳤다. 유배에서의 극형이 내려진 것이다. 고금도와 신지도는 유배지 중에서도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원악지로 구분되었다. 그나마 태형과 사형은 피했으니 원교는 죽지 않고 성한 몸으로 이곳에 온 것이 임금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 여겼다.

 

철썩거리는 파도, 가까이 보이는 육지의 산능선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바람이 분다. 이제는... 살아야겠다.

 

신지도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 그를 이끌었다. '도봉산이 그리워질까 하여 차마 월출산도 바라보지 못하겠다'며 강진 유배지에서 다산 정약용이 그랬던가. 눈앞에 펼쳐진 육지의 산들은 원교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악형의 심리 때문에 생각만으로도 이곳은 끔찍한 곳이었을 터였다.


원교는 답답한 마음을 삭히려고 섬 곳곳을 헤매다 섬과 섬 사이의 망망한 바다, 거친 파도와 바위에 부딪히는 포말, 갈매기의 날갯짓을 보며 묶여있는 자신의 처지를 관망했다. 그러다가 신지도 주민들의 정성어린 보살핌에 어느덧 마음을 가다듬고 후학을 가르치며 서예에만 매진한 그였다.  23년의 유배 생활 중 이곳에서 15년을 머물며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조선의 글씨 원교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했던 것이다.

 

18C 초, 조선사회는 새로운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
 
 한국 서화사에서 민족 특유의 자각이 싹트던 18세기 초, 서예에는 동국진체가, 그림은 정선(1676~1759)으로부터 동국진경(東國眞景) 화풍이 전개됐다. 동국진체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1662~1723)와 서화가이며 옥동의 친구인 공재 윤두서(1668~1715)의 합작으로 비롯됐다. 다시 백하 윤순(1680~1741)에게 전수된 후에 원교가 이를 완성했다고 전한다. 원교는 중국 서예와의 차별성을 위해 민족 고유의 정서와 감정을 토대로 조선만의 조형성을 추구하였다.


 원교는 ‘서결’이라는 서법책을 썼다. '원교서결'은 중국과 조선의 서법을 역사적으로 상호 비교하고 조선 특유의 서법을 밝혔다. 이것은 ‘동국진체’라고 하는 조선 고유서체의 형성 과정과 이론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무엇보다 원교는 서예가이기 전에 주자학에 뿌리를 두고 있던 조선사회에서 양명학을 받아들이고 연구하던 학자였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인간평등 사상에 대한 이론을 조선사회에서 펼친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하지만 원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사상가였기에 원교는 우리민족 고유의 생명력을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시문과 그림은 또 어떤가. 그를 칭송하고 따르던 사람 중 원교가 죽고 난 후,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원교의 서책을 구해 필사했다. '과연, 조선의 글씨가 이토록 아름답다'고 칭송하며 자신의 저서에 빠뜨리지 않고 원교 이광사를 기록해 두었다.
 

신지도에 와서 곧바로 원교 적거지를 찾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래서 신지도의 첫 탐사를 원교 이야기 찾기에 나선 것이다. 면소재지 어디에 적거지가 있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아는 이가 없었다. 안내판 하나도 없는 것이 이곳 실정이었다.

완도 인근지역의 문화관광해설사들 마저도 원교의 글씨가 “대흥사에 걸려있네, 진도에도 있네, 강진 백련사에도 있네”하며 여기저기 동국진체에 관한 이야기만 갖다 붙여 놓을 뿐. 원교 이광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유산을 편파적으로 알리는데 지역사회가 한몫을 한 것 때문이라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계속>


정지승 다큐사진가


 


사진> 폐허가 된 원교의 적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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