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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그 품을 기억하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4.16 16:44
  • 수정 2021.04.1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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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맛이 섞여있는 바다, 멀리 보이는 수면은 쨍하고 깨질 듯 푸른색을 얇게 펼쳤다. 바람이 거드는 데로 반물빛이 뒤척인다. 찡그린 이마의 주름처럼 파도가 밀려온다. 짜고 맵고 다디단 인생을 겹겹이 몰고와 부려놓는다. 물의 흐름이 내게로 온다는 것, 어떤 생이 당도 하더라도 또다른 뭔가가 밀려오고 있다는 건 늘 기다림이다.
바다는 먼 곳을 기다리게 해서 매번 그 앞에 서게된다. 도시의 파열음으로 귀앓이를 했던 달팽이관이 모처럼 갯바람이 들려주는 해조음으로 호사를 누린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정지된 것 같은 침묵이 흐른다. 자연이 조율하는 비경 앞에서 가슴이 처지도록 담아 온 생의 건더기를 바다 밑으로 가라앉힌다. 떠밀려간 시간과 침전된 시간이 아슴아슴 눈 앞에 펼쳐졌다.
기억에 있는 바다는 가장 어두운 색으로 낮은 곳에 가라앉아 있다. 


어린시절 학교를 파하고 바다에 나간 엄마를 찾아 무턱대고 집을 나섰다. 팽나무골을 지나면 서서히 내리막길이다. 마을이 끝나면서 큰길이 이어지고 양쪽으로 널찍한 논들이 마을의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끝도 없는 검은 색이 눈앞에 펼쳐진다. 기억에 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검은 바다,  토도톡 토독 소리를 뱉어낼 때마다 걸쭉한 갯벌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듯 작은 숨구멍들을 만들었다.
엄마가 등을 구부려 검은 바다를 양손으로 휘젓고 지나가면 상형문자로 새겨지는 고난의 경전, 지금도 비릿한 바닷냄새가 맡고 싶을 때면 심장에 들어앉은 고분벽화 같은 경전을 꺼내 읽는다. 두 다리를 넓적다리까지, 한쪽 팔은 어깨까지 갯벌에 파묻고 몸을 둥글게 말고 바다것을 잡는다. 허리 펴는 것이 죄이기라도 하듯 머리까지 웅크리고 온몸을 들썩인다.


바다는 그래서 가끔 내 심장 가장 낮은 곳에 가라앉은 침전물 같기도 하다.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다 고향에 가면 늘 바다로 가는 길을 걸었다. 맨발로 갯골을 따라 걸으면 생물들의 숨소리가 오케스트라처럼 합주한다. 검은 바다의 숨소리가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개펄 범벅이 된 심장에 그 옛날 엄마의 모습이 똬리를 틀었다. 엄마의 품처럼 부드럽고 아늑한 바닷물이 빠져나간 검은 바다.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보면 바깥 풍경에 바다가 겹쳐 보일 때가 있다. 그리우면 고향 근처 바다로 간다. 장소는 때론 그리움으로 빨려 들어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다시 가고 싶은 곳, 과거에 내가 머물렀던 장소에 서면 그때 그 시절의 나로 순간이동 한다. 세월에 떠밀려 조금씩 변할지언정 고유명사처럼 기억은 그대로다. 장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잔잔한 위로가 되기도 하고,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내겐 크고 작은 섬들이 둥둥 흐르는 남도의 바다가 그런 곳이다. 명치에 묵직하게 뭔가가 걸리면 찾아가는 가까운 바다에서 침묵으로 고향을 부른다. 눈앞에 놓고도 가 닿을 수 없는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 없는 엄마, 그 두 글자를 그리워하는 나,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를 가득 채워주는 바닷물이 남실거린다.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 몇 가닥을 들춘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어선들이 엄마 손에 흔들리는 요람처럼 굼실거리는 물결에 몸체를 맡기고 흔들린다. 바다 사내들의 우직한 어깨도 따라 흔들린다. 


우뚝 솟은 등대 귀퉁이에 갈매기가 앉았다가 끼룩끼룩 냉정하게 운다. 뭉쳐진 구름 몇 마리에 하늘이 가려지더니 어둑해진다. 서쪽 하늘이 붉게 충혈돼 산자락 모서리로 찾아 들어간다. 몰려오는 어두운 그림자에 방백 같은 고요가 깃들고, 진한 남색으로 어스름해지는 시간이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지운다. 등대가 불을 켠다. 길 잃은 절망에 희망이 돼 줄 빛이 잠들어가는 바다를 비춘다. 어둠 속으로 불빛이 밀어처럼 번져간다. 내가 찾아 헤매는 그리움처럼 수평선에 걸렸는지 물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엄마가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듯 바다 위 불빛이 파르르 떨린다. 빛의 산란이 바다 위 신기루 같다. 멀리 보이는 도시에서도 불빛을 켜고 나를 재촉했다.

 

김지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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