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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란 이름으로, 아내란 이름으로 그리고 엄마의 이름 김정숙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1.05.08 10:48
  • 수정 2021.05.0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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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안으로 한 마리 나비가 들어 오는 듯했다. 이른 아침 눈뜰 때부터 어둠이 오는 늦은 밤까지, 꿈결 속으로 찾아 와 춤추는 나비! 한 마리 나비가 평생토록 가슴 안에 사는 것 같은 나의 임이었다.


님의 눈망울을 보았을 때, 어쩌면! 어쩌면! 세상에 저다지도 반짝이는 별빛이 있을까? 님의 상냥한 속삭임은 맑은 별들이 부딪히는 소리! 너무나 생생하고 너무 좋아서그 소리, 깎아내고 다듬어 내 심장 안에 고이 넣어 두었네.


언젠가 TV에서 방영됐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노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보고 있는 듯했다.
생명은 바람보다 더 출렁이고 하늘보다 더 깊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생명 앞에서 좀 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어느 곳에 내려 앉던지 따뜻한 눈물이 있어 생명은 피어날 수 있는 것.


김정숙 엄마는 1937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고 했다.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 시부모와 3남 4녀 대가족이 함께 사는 곳으로 시집왔지만 서로가 우애하고 화목해 지난 생활은 결코 힘들지만 않았다고 했다.
시부모를 모시고 시누와 시삼촌, 그들의 대소사에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까지 모두 감당하면서 밭일과 논일, 바닷일까지 너무나 분주하게  쉴 틈 없이 바쁜 세월이었다고 했다. 이제 좀 여유 있을까 싶었는데 온몸이 병들고 허리뼈와 연골이 닳아 큰 수술을 했으며 어깨의 근육까지 파열되어 어깨 수술이랑 몇 년 전엔 면역성이 약해져서 간에 염증이 생겨 치료하는 과정의 후유증으로 왼쪽 손가락 절단하는 아픔까지, 며느리란 이름으로 아내란 이름으로 그리고 엄마란 이름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다 내놓았다고. 그래서 엄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인가보다.
시가는 완도군 군외면 망축리, 시어른은 군외면 부면장을 지냈고 남편 서광근 씨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다고.


슬하엔 1남 4녀를 뒀고 큰딸이 벌써 육십을 바라본다고.
독실한 크리스챤인 큰딸은 "한정된 공간에서 대가족이 화목하게 살아가려면 누군가의 특별한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우리 엄마와 아버지셨다"고 했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를 섬기는 모습이 참으로 남달랐는데, 아침저녁으로 잘 주무셨느냐? 잘 주무시라고 손자들까지 모두 함께 문안을 여쭙는 일이 일상의 시작이고 마침이었다."고. "아버지 또한 출퇴근 인사를 조부모님은 물론이고 아랫마을에 거주하시는 증조부모님에게도 잊지 않으셨다"고. 시어머니는 매사가 반듯하고 정확한 사람이었는데, 성실과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고 목표 의식이 분명하고 성취욕이 강한 양반이었다고. 그래서 정숙 엄마가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큰딸은 "할머니는 한 번 일을 시작하시면 정한 몫을 다하기 전까지는 절대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는데, 그러다 보니 식사 때를 놓치시기 일쑤였고 그렇게 뒤늦게 돌아오시는 할머니의 식사를 다시 챙겨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고 불평하실 만도 하건만 군소리 없이 변함없이 정성스럽게 섬기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경제권은 시아버지가 담당했는데, 남편의 월급까지 고스란히 시아버지에게 드렸고, 용돈을 받아 썼단다. 시장 보는 일은 시어머니와 남편이 담당. 어쩌다 엄마가 시장을 볼 때면 의논하고 필요한 만큼만 받아 썼단다.


그것이 엄마의 도리였고 대가족을 건사하는 질서였다고 했다. 엄마는 바깥출입을 거의 없었는데, 3남 4녀의 장남 며느리다 보니 명절이 돌아와도 친정 나들이 한 번 마음 놓고 못했다고. 한 번은 친정 엄마가 노환으로 누워 있을 때, 엄마가 갈 수 없어 큰딸을 보냈더니 친정 엄마는 큰딸을 보며 “정숙이 정숙이 이 무정한 정숙이” 엄마 이름만 되뇌였단다.
 큰딸이 사는 서울에 가더라도 시부모가 걱정돼 당일로 내려가겠다고하면 딸 내외와 실갱이를 하다 겨우 하룻밤 지내고 다음 날 아침 내려왔다고.


남편 서광근 아버지 또한 직장의 승진과 당신의 이상과 꿈보다는 부모님을 섬기며 함께 살아가는 도리를 소중히 여겼는데, 고향 완도를 향한 애향심과 제자 사랑이 뼛속까지 베인 사람이라고.
이런 효심과 애향심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고운 눈길로 바라보는데 이들의 추천으로 완도군 효부상을 받은 경력도 있다고 했다.
엄마는 명절이 되거나 추수가 끝나면 시어머니와 잊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고. 마을과 이웃 마을까지 어려운 사람들에게 음식과 곡식을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고. 또 타향에서 학교 사택에 사는 아버지의 동료 선생님들과 학교에서 일하시는 사람까지 챙기는데, 자녀들 또한 나누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배우고 체험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식들의 밥상머리 교육 또한 남달라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어르신들이 수저를 들기 전에는 수저를 들 수 없고 아무리 먹기 싫어도 어르신들이 수저를 내려놓기 전에는 수저를 내려놓지 못하게 했다고.


방 안에 앉을 때는 등을 벽에 기대지 않고 허리를 꽂꽂하게 세워 앉게 했으며 언행은 늘 삼가고 조심해야 하며 언행일치가 강조했다고.
엄마와 아버지는 꽃과 채소 과실 수를 좋아해 텃밭에는 온갖 꽃나무와 꽃씨를 심고 뿌려서 앞마당을 아름답게 가꿔 철 따라 과일을 따 먹고 사철 꽃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줬는데, 별빛이 내려앉고 달빛이 드는 여름밤, 모깃불을 피우고 식사 후 우물가에서 엄마는 설거지, 아버지는갖가지 꽃의 전설과 별자리 찾기, 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름다운 꿈들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해줬단다. 또 아버지는 여러 악기를 잘 다루고 음악과 노래, 춤을 좋아해 많은 가곡과 동요를 가르쳐 줬는데 자녀들에겐 율동대회를 열어 상까지 건네는 낭만적이고 자상한 아버지였단다.


부부는 대가족이라 사랑을 마음껏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일 년에 유일하게 친정아버지 기일엔 함께하는데, 외가의 온 식구들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서광근 아버지는 “사랑하는 김정숙 씨. 정말 사랑하오!”라는 말을 반복해서 표현해 외가에서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김정숙 씨”라고 흉내를 내며 별명처럼 불러주었다는데, 64년을 함께한 엄마와 아버지는 함께 자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형제 우애를 유독 강조했던 엄마와 아버지는 서툴고 부족한 큰딸을 훈계할 때도 동생들 앞에선 절대 훈계하지 않았는데, 혹여나 동생들이 큰언니와 큰누나를 무시할 수 있어서였다고.  최근엔 자녀들에게 김치를 담아 자식들에게 보내고 나서 폐렴 증상이 나타나며 성치 않으신 손가락이 골절되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큰딸은 온몸이 전율하며 소름까지 돋았다고 하는데, 자신 또한 부모이지만 엄마만큼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고 가늠이 안된다고.
아버지는 현재 87세로 오래전 목 디스크 휴유증으로 왼팔을 사용할 수 없고 엄마는 면역성이 약해져서 간에 염증이 생겨 치유하는 과정에 휴유증으로 결국 왼쪽 네 손가락 한 마디씩을 절단한 상태라고 했다. 큰딸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가곡은 ‘바위고개’인데, 엄마가 혼자 있을 때 가끔 부른 것을 훔쳐 듣곤 했다는데, 두 분이 정말 오래오래 사셨으면 한다고.


그대, 어디에 있든 언제나 한결같이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내 곁에 있어요
그리움의 상념과 보고픔의 번뇌에 스러질지라도
그대 향한 그리움! 단 한줌도 흘리지 않아요
나 언제나 언제까지나 
그대 숨결 속에 길이길이 살고 지고
아니... 넋을 잃고 사라지더라도 나,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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