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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 정지승 기자 p6140311@hanmail.net
  • 입력 2021.06.11 10:06
  • 수정 2021.11.20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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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게 인지상정이다. 오동나무 자색 꽃 짙게 물들고 밤새워 소쩍새 울면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된다. 한국인들은 바쁜 농사철에 고향 생각이 절로 든다고 한다.
고향의 어머니, 산새 소리, 들꽃 향기를 떠올리며 향수에 젖어 있을 무렵이면 6월 산야에 찔레꽃 향기가 그윽하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산과 들녘 지천으로 핀 찔레의 하얀 꽃잎이 흩날리고 나서야 전원 속의 집들 담장마다 붉고 탐스러운 찔레꽃이 가득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고향”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그런데 가요 속의 그 '남쪽 나라'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을 뜻한다고 하니 정말 의외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해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전전긍긍하며 떠돌던 북간도 유랑민들의 처연한 삶이 가요로 불렸단다.


 해마다 6월이면 북간도에 불어오는 평안도의 찔레꽃 봄바람을 느끼며 유랑민들은 몹시도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것이 가수 백난아가 불렀던 가요 ‘찔레꽃’의 탄생 배경이다.
 6.25 전쟁 때 북녘땅을 등지고 내려온 피난민에게도 함경도와 평안도는 변함없이 고향의 상징이었다. 전쟁 이후, 대한민국 재건을 위해 형성된 산업화 바람으로 농어촌 사람들이 도시로 대거 이동하면서부터 한국인의 고향은 지금의 남쪽 지방, 그러니까 서울 이남 지역으로 바뀌어 갔다.


 6.25를 거치면서 가요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이 두만강, 대동강, 삼팔선 등 대부분이 북녘땅을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면, 산업화 이후 가요에 등장하는 곡들은 지금의 남도 땅에서만 자생하는 동백꽃이나 섬마을 같은 서울 이남 지역에 존재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가요의 소재가 점점 바뀐 것만 보아도 우리네 고향 변천사가 쉽게 이해된다.
 그런고로 한국인이 생각하는 고향은 북녘땅이나 남녘 땅 모두가 하나의 ‘남쪽 나라’란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하나뿐인’ 남쪽 나라 내 고향을 두 개의 남쪽 나라로 갈라놓고 말았으니 우리는 모두가 고향을 잃고 유랑하는 실향민(失鄕民)이 아닌가 싶다.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거쳐온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서 한국인의 고향은 항상 가난과 서러움 눈물과 시련으로 가득했고, 그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도 찔레꽃은 언제나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대표적인 들꽃이 되었다.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그 이름, 찔레꽃

 가수 백난아(1925~1992)가 부른 <찔레꽃>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첫 발표를 냈는데,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향수를 자극하는 가사가 시대적 상황과 맞아떨어져 꾸준한 인기를 얻으면서 국민가요가 됐다. 들리는 얘기로는 작곡가 김교성과 백난아가 만주 공연을 다녀온 뒤 그곳에 있는 독립군들이 고향을 바라보는 심정을 노래에 담았다고 한다.
 2007년 6월 제주시는 백난아의 고향 마을인 한림읍 명월리에 백난아 노래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지었다.


그리고 찔레꽃을 공원 주변에 심어 축제를 열었는데, 그때 붉은 찔레꽃을 구할 수가 없었다고.
찔레의 종류가 좀찔레, 털찔레, 제주찔레, 국경찔레 등으로 나뉘는데 아쉽게도 우리 주변에 붉은색을 띠고 있는 찔레는 모두가 원예종이라고 한다.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고산지대에 주로 자생하는 진분홍빛 국경찔레 종(種)을 제외한 한국 산야의 찔레꽃은 모두가 하얗다. 마치 우리의 민족성을 상징이나 하듯 하얗고 순수한 꽃이 바로 찔레꽃이다.


 어느 가객의 노랫말처럼 하얗고 순박한 꽃,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꽃, 나라 위해 싸우다가 전장에서 스러져 간 전우를 떠나보내며 목 놓아 울었을 어느 님들의 넋을 닮아 찔레꽃은 한국 산야 지천으로 펴 그 향기조차도 슬픈 꽃이다.
 어디 찔레뿐이랴. 5~6월 초하(初夏)의 들녘은 우리 민족을 닮은 꽃, 하얀 들풀로 가득하다. 이렇게 들꽃 향기 나부끼는 고향 들녘에 서 있으면 평화를 외치며 산화한 숭고한 사람들의 손짓인 양 삐비꽃 하얀 솜털이 바람결에 애처롭다.


 그러다가 문득 넓은 들녘을 바라보면 ‘화해’라는 꽃말을 품고 서 있는 한 무리의 망초가 호국의 영령들께 헌화하듯 온 누리 가득 피었다 진다. 우리 산하 어디서나 하얀 들꽃이 부르는 흐느낌이 가득한 호국보훈의 달 6월은 그래서 더욱 슬프고도 애잔하다.
        
정지승/다큐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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