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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엘 갔다

  • 김정호 kjh2580@wandonews.com
  • 입력 2007.02.12 22:52
  • 수정 2015.11.0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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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엘 갔다. 청산도는 남으로 남으로 내달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곳,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한 섬이다. 지난 93년 개봉 후 우리나라 영화 최초로 관객 100만 명을 훌쩍 넘긴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이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청산도가 속해 있는 완도는 또 청정해역의 섬들에서 올라온 싱싱하고 풍부한 산물의 집산지, 나라를 지키는 수군이 유독 중히 여겼던 군사적 요충지, 1200년의 베일을 벗은 청해진 유적지가 있는 장보고의 땅,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바다로 나가는 가능성의 땅이다.

 

지난 토요일, 오전 8시10분 완도항을 출발하는 첫 배를 타고 완도군 청산도에 갔다. 여행 목적이 아니다. 조문(弔問)이다. 동료가 조모상을 당한 탓이다. 한편으로는 <서편제>를 촬영했던 추억의 황톳길과 돌담길을 떠올렸다.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도 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 길 양쪽으로 펼쳐질 보리밭도 생명력을 더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숨 가쁘게 달려간 청산도의 바다는 파랬다. 산도 파랗고 하늘도 파랬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돌담과 언덕 너머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마을길이 참 정겨웠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내 마음속 고향 같은 분위기 그것이었다.

 

"당재 언덕에서 황톳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는 세 사람. 아버지 유봉(김명곤분)은 등짐을 메고,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딸 송화(오정해분)는 가방을 들었다. 떠꺼머리 아들 동호(김규철분)는 북을 메고 있다. 피곤에 찌들어 터벅터벅 걷던 이들의 느린 걸음은 아버지가 '진도아리랑'을 선창하고 딸이 화답하면서 활기를 띤다. 시무룩한 표정이던 아들도 어느새 흥이 나 힘 있게 북채를 잡는다. 언덕 아래에 다다른 세 사람의 어깨춤이 화면 가득 덩실거린다."

 

청산도를 생각하면 으레 떠오르는 <서편제>의 한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귓전에서는 '진도아리랑'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청산도의 아름다움과 정겨움이 한 순간 나를 여행객으로 만들어버렸다. 조문을 하러 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채 잠시 나들이를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버렸다.

 

초분이라니?

 

고인의 빈소는 마을장례식장에 마련돼 있었다. 섬마을에도 장례식장이 들어서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라웠다. 발인을 하는 날이기에 뒤늦게 조문을 왔다는 것이 조금은 나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청산도에선 전혀 어색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동네 사람들까지도 조문행렬에 줄을 이었다. 뭍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조문을 하고 잠시 앉아있는 사이, 귀를 번쩍 띄이게 하는 소식이 들려왔다. 매장을 하지 않고 초분(草墳)을 쓴다는 것이다. 초분이라니?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이엉으로 덮어두었다가 몇 년 뒤 남은 뼈를 씻어 땅에 묻는 장례풍속이 아닌가? 오래 전에는 뭍에서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일부 서남해안 섬에만 남아 있다던데…. 그 풍속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흥분되기까지 했다.

 

자리를 함께 하고 있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왠지 좀 혐오스럽고 위생적이지 못한 매장방법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 또한 그 부류에 가까웠다. 반대로 초분이야말로 가장 위생적이고 예의바른 장례풍속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특히 이곳 청산도에서는 예부터 초분을 하는 것이 조상에 대한 가장 극진한 예의였다고 했다. 곧바로 날송장을 선산에 묻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고, 살과 물이 다 빠진 깨끗한 뼈로 선산에 가는 것이 조상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발인식을 마친 장례행렬은 낮12시가 다 되어서야 장지(청산면 구장리)로 향했다. 길 양쪽으로는 한참 자라고 있는 보리밭이 푸르게 출렁이고 있었다. 장지는 산을 등지고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양지바른 곳으로 '명당'처럼 보였다.

 

일반적으로 장지에서 볼 수 있는 포클레인과 삽 같은 도구는 볼 수 없었다. 다만 볏짚으로 엮은 이엉 네다섯 마름과  형의 용마름, 그리고 약간의 새끼줄이 있을 뿐….

 

청산도의 초분 풍습은 땅바닥에 돌을 깔고('덕대'라 함) 그 위에 솔가지를 꺾어 올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솔가지는 수평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단다. 그 위에 관을 올려놓고 다시 솔가지로 지붕모양을 만든 다음 이엉으로 두르고 용마름을 올렸다. 그 위로 돌을 매달아 묶었다. 관의 길이만큼 길쭉한 초가 형태의 임시 무덤이 만들어졌다.

 

이 초분은 3∼4년 후에 다시 해체, 시신의 뼈를 드러내 깨끗이 하는 '씻골'을 거쳐 땅에 묻는 '본장'을 한다는 게 마을사람들의 얘기였다.

 

초분이 마무리될 때쯤 고개를 들어 저만치를 보니 <서편제> 촬영지가 있는 당리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도청리 선착장과 초분이 들어선 장지의 중간쯤이다. 돌아오는 길에 부러 당리마을에 들러 영화 속에 나왔던 초가집과 돌담길을 거닐었다. 그 길에 세워진 드라마 <봄의왈츠> 세트장이 조금은 생뚱맞아 보였지만 그런대로 봐줄만 했다.

 

당리마을과 맞닿은 도락리 마을의 해안가 풍경도 아름다웠다. 구장리 쪽으로 보이는 층층이 논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해질 무렵 석양을 받으면 더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까지 머물 수 없는 처지가 아쉽기만 했다.

 

이래저래 청산도는 멋진 섬이란 생각이 새삼 또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 탓에 몸은 녹초가 다 됐지만 청산도에서의 하루는 정말이지 오진 시간이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꼭 다시 한번 찾고 싶은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