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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촌(松 村) 지석영.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마마를 제압하다.

신지도 송곡 마을. 개화 혁신 민본주의를 실천한 지석영과의 만남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07.03.23 21:24
  • 수정 2015.11.2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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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촌 지석영이 귀양살이했던 집터    ◎한용현


 

천연두는 사람과 소 등 동물이 같이 걸리는 인수공통의 전염병이다. 이 사실에 관심을 둔 에드워드 제너라는 사람의 연구 노력으로부터 천연두 예방의학이 시작한다. 에드워드 제너는 1749년 영국 글로스터주 버클리에서 태어났다.

에드워드는 13세 때부터 의학을 배웠다. 1770년 J헌터에게서 외과학을 공부하고 세인트 조지 병원에서 근무하였다.

 

도시에서 의학공부와 실무를 배운 에드워드는 1773년 고향에 돌아와 병원을 개업한다. 그는 인체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깊은 관심을 두고 관찰과 연구를 지속했다. 이러한 관찰과 연구 끝에 소의 천연두 즉 우두에 걸렸던 사람은 평생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지역 주민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에드워드는 소의 천연두와 사람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연구 관찰하였다. 그 결과 소의 천연두가 사람에게 감염될 경우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염되는 천연두보다 그 증상이 매우 약하고 한번 소의 천연두에 걸렸던 사람은 평생 다시는 소에게로 부터든 사람에게로 부터든 천연두에 감염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는 1796년 우두에 걸린 시골 아낙에게서 우두 농 (牛痘 膿)을 채취하여 여덟 살 된 유년의 팔에 실험적으로 접종하였다. 이로부터 6개월 후 다시 이 유년에 사람에게서 채취한 천연두 농 (天然痘 膿)을 접종하였으나 그 유년은 천연두 감염현상을 보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오랜 연구와 실험을 바탕으로 1798년“우두의 원인과 효과에 관한연구”라는 책의 출판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발표하였다. 수많은 의혹과 논란을 거쳐 1803년 런던에 “왕립제너협회”를 설립하여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우두 예방 접종을 해주었다.

 

이로부터 세상에 천연두로 말미암은 공포와 피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왕립제너협회 설립 이후 79년이 지난 1882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도 우두 법이 시행된다. 조선의 천연두 예방의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송촌 지석영을 만나야 한다.

 

송촌(松 忖) 지석영(池錫永)은 1855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관훈동인 한성부 중서훈동에서 아버지 지익룡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송촌은 의학에 관심이 많아 천연두에 관한 관찰과 연구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조선에서도 한번 천연두에 걸린 사람은 두 번 다시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때의 천연두 예방법으로는 장묘법 (漿苗法) 환자의 환부 고름을 솜에 묻혀 콧구멍에 넣는 방법. 의묘법 (衣苗法) 환부가 드러난 아이의 속옷을 벗겨 건강한 아이에게 입힌다. 한묘법 (旱苗法) 환부 딱지 가루를 은관이나 거위 깃털 관에 넣고 코로들이 마시는 방법. 수묘법 (水苗法)환부 딱지가루를 물에 녹인 다음 솜에 적시어 콧구멍에 넣는 방법 등이 있었다.

 

이 외에 천연두 환자의 환부에서 농을 채취해 건강한 사람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발라주는 인두 법이 있었다. 그러나 천연두 환자에게서 채취한 천연두 균은 소에서 채취한 균보다 강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 천연두에 감염되어 죽을 위험이 컷고 주위 사람에게 전염할 위험이 많았다.

 

이러한 사실을 연구와 관찰. 경험으로 알고 있던 송촌은 1876년 일본으로 떠나는 수신사 일행 중 스승인 박영선에게 일본의 앞선 천연두관련 서적 구입을 부탁하였다. 박영선은 수신사로 일본에 가서 “종두귀감(種痘龜鑑)”이라는 책을 구입하여 귀국 후 제자인 송촌에게 전달하였다.

 

1879년(고종 16년) 송촌은 나이 25세 때.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생의원으로 가서 2개월 동안 종두법을 배운다. 제생의원에서 우두에 관한 앞선 지식을 배운 송촌은 두 묘(송아지에 접종하여 접종액을 만들어낼 원액)와 종두 침을 구해 서울로 돌아오는 중에 충주의 처가에 들러 2살 된 처남에게 우리 민족 최초의 우두접종을 한다. 여기에 얽힌 소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송촌은 장인에게 천연두의 폐해와 우두 접종을 통한 과학적인 예방법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장인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설득하였다고 생각한 송촌은 먼저 아직 어린 2살 된 처남에게 접종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사위의 장시간에 걸친 설명에도 아랑곳없이 장인의 천연두 예방관련 지식은 일본의 조선침탈과 관련한 조선인 죽이기나 조선인 약화하기로 알고 있었다.

 

물론 어린 아들에게 우두접종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장인은“사위 자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위험한 독약을 어떻게 어린 처남에게 놓겠다는 생각을 하는가?” 라며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이후 사위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 송촌의 입장이 말이 아니었다.

 

이에 송촌은 하는 수 없이 처가에서 떠나 서울로 돌아가고자 행장을 꾸리고 장인에게 떠나겠다고 하직인사를 하자 장인이 놀라 묻기를 “자네 왜 떠나려고 하는가?”라고 물었다. 송촌이 말하기를 “장인께서 저를 미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사위를 못 믿으시는데 제가 어떻게 처가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저는 떠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위의 한탄을 들은 장인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의 사위가 평소 사리에 어긋난 말과 행동을 한 적이 없고 사려 깊고 신중하며. 신학문을 좋아한다는 점을 떠올려보고 사위에게 다시 짐을 풀라고 한 다음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우두를 시술케 하였다고 한다.

 

어린 처남에게 우두를 시술한 송촌은 혹시라도 “우두 시술”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여 불안한 3일을 보냈다. 3일이 지나자 처남에게서 우두접종의 효과가 나타났다. 훗날 송촌 지석영은 이때의 감격을 두고“나의 평생을 두고 볼 때 28세에 과거에 급제했을 때. 귀양살이에서 풀려났을 때 매우 기쁨이 컸다.

 

그러나 처남에게서 우두접종의 효과가 나타날 때에 비하면 그런 기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라고 할 정도로 이때의 감격이 컸었다고 한다. 송촌은 이곳에서 처남 말고도 원하는 마을주민 40여 명에게 우두를 접종했다.

 

송촌은 우두에 관하여 더 공부 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1882년 5월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는 김홍집을 수행해 일본으로 가서 앞선 종두법을 배우고 돌아온다.  이후 종두장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우두를 시술하고 천연두 예방법을 널리 전파하게 된다.

 

송촌의 천연두 예방운동은 개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 결과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친일 개화당으로 몰려 충청도 덕산으로 피난을 가야 했고 종두 장은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타버렸다. 임오군란이 막을 내리고 다시 돌아온 송촌은 종두 장을 다시 세우고 전주와 충청도에도 “우두 국”을 열었다.

 

이후 사헌부 장령 벼슬을 얻어 요즘 말로 하면 개방과 혁신을 주장하다가 조정 중신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1887년 신지도 송곡 마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송촌이 귀양살이 하던 집은 송곡 마을 북쪽 대봉산이라는 낮은 언덕배기 중턱에 자리한 곳이다. 집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뒤편 언덕이 시누 대에 둘러싸인 좁은 집터만이 남아있다.

 

송촌은 유배지에서 “신학신설”이라는 우리 민족 최초의 건강 위생에 관한 예방의학서“를 지어냈다. 이 책은 일반 백성이 읽고 이해하기쉽도록 한글로 지어졌다. 1892년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온 송촌은 “우두보영당”을 세우고 이 땅의 수많은 어린이에게 우두접종을 했다.

이후 송촌은 형조참의. 승지. 동래부사 벼슬을 하게 된다. 1896년 동래부사. 부산항 재판소 판사 등으로 재직하면서도 천연두 예방에 힘써 널리 우두접종법을 보급한다.


▲송곡 마을 앞 부둣가. 그옛날 송촌도 이 바닷가에 서서 서울 하늘을 바라다 보았을 것이다.
 

제2 제3의 제너. 지석영의 노력으로 1980년 WHO는 천연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사라졌음을 공식 선언하였다. 1993년에는 한국정부가 천연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천연두는 사람에게서 감염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지구에서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

 

세균전 또는. 테러에 효과가 크다고 판단하는 조직이나 국가가 있는 한 천연두 공포는 계속된다. 현재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천연두를 두고 선진국을 포함해 많은 국가가 백신을 연구개발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2001년 11월 6일 다시 천연두를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하였다.

 

1899년에는 송촌의 청원으로 조정에서 “관립의학교”를 설립하고 송촌을 초대 교장으로 임명한다. 1907년 의학교를 폐하고 “대한의원 의육부”로 바뀌어 학감의 자리를 맡았다가 3년 후 사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의 모태가 과연 대한의원인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이상과 같이 송촌 지석영은  그 시대를 앞서 살아간 개화파요. 선구자였다.

 

송촌은 의학 발전뿐 아니라 농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밀농사의 가치를 주장하고 밀 농사법을 설명한 “중맥설(重麥說)”이라는 책을 지어 보급하였으며. 태음력과 태양력을 함께 쓰자는 주장을 널리 펴기도 하였다.

 

특히 송촌의 민본주의를 알 수 있는 점으로 그는 조선의 선비와 백성이 어려운 한자를 쓰기에 신학문이 일반백성에게 전파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쉬운 우리글인 한글의 보급을 위해 노력하였다. 주시경과 함께 최초로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사람도 송촌 지석영이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1908년에는 “국문연구소” 소장의 직책을 맡아 다음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지어 보급하였다.

 

송촌은 1910년 8월 한일합방(경술국치)이 발표되자 주위의 청을 뿌리치고 대한의원에서 물러나 다시는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요즘의 한의사격인 의생으로 어린이의 병을 돌보았다.

송촌 지석영은 민족사에 남긴 수많은 공훈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라는 오명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대구감영 판관으로 일본군을 도와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앞장섰다.

 

또한. 1909년 일본의 조선침략 선봉장인 이토오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쓰러지자 이토오 히로부미의 죽음을 추도하는 모임에서 추도사를 읽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서 송촌 지석영은 “한국 과학문화재단”이 추진한 “과학기술자 명예의 전당” 등재를 거부당했으며. 부산시의 “부산을 빛낸 인물” 선정에서도 탈락하였다.

 

이는 “역사의 바로 섬”이다. 그러나 송촌의 친일행각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이는 다른 친일파와 분명히 차별화하는 점이다. 한일합방(경술국치)이후 1935년 죽을 때까지 일본 군국주의자에게 협력한 어떠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송촌 지석영과 관련하여 안타까운 일은 친일 개화당과의 관계. 동학농민군과 관련한 일. 이토오 히로부미 추도사와 관련한 일등에 대한 송촌 자신의 뜻이나 소회가 담긴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조선의 개화와 혁신을 위해서 또는. 조선백성전체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 알 수 없고 다만 친일의 기록만 남아 그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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