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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원에 미소 없는 까닭?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0.01.14 13:47
  • 수정 2015.11.2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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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서부 길(77번 국도) 중간 쯤 당인리에 미소공원이 있다. 완도군이 지난 해까지 완성시킨 여덟 공원에 들어간다. 갈문리 일몰공원, 삼두리 갯바람공원, 당인리 미소공원, 완도읍 빙그레공원, 동망산 일출공원, 가용리 해변공원, 가용리 체육공원, 장좌리 수석공원 등이다. 최근 늘어난 관광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전망좋은 곳에 조성된 공원이 마치 좋다. 화장실이 없는 것만 빼면, 당인리 미소공원 역시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다.

미소공원에서 당인리 윗마을 쪽으로 백미터 쯤 내려가면 도로 오른편에 무덤이 둘 있다. 허사겸 의사와 그 부친이 북향으로 누워 계신다. 무덤 앞 안내판은 이렇게 설명한다(약간 수정).

허사겸 선생은 1857년 군외면 당인리에서 출생했다. 1883년(고종 20년)은 부패한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당시 완도에 설치되었던 가리포진의 첨사였던 이상돈은 비자나무 등 특산물을 강제로 징발하는 등 백성들에 대한 수탈과 학정으로 원성이 극에 달했다.

이에 허사겸 선생을 비롯한 의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포악한 첨사를 배에 실어 영암으로 축출했다. 그리고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고 있던 백성들을 석방시켰으며, 지역 자치기구인 향도청을 설치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듬해(1884년) 관군에 의해 진압되어 주모자로 지목된 허사겸 선생은 1884년 3월 23일 강진 병영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때 허사겸 선생의 나이 27세였다. 문사순 선생 등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분들도 심한 고문과 귀양살이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 거사를 계미민요라 하는데 1894년에 시작된 동학농민 항쟁보다 10년 빠른 민중의거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다. <청해비사>의 저자인 소남 김영현 선생은 허사겸 선생을 추모하는 시 한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무덤으로부터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건너편에 창의사(倡義祠)가 있다. 허사겸 의사를 포함한 계미민요 관련 여덟 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지난 2008년 11월 세워졌다. 그러나 준공한 지 일년이 넘도록 화장실은 물론 관리사나 조경을 위한 나무 한 그루 없이 삭막하다. 허사겸 선생의 의로운 뜻을 다시금 세우고 지켜야 할 후손들이 무심하게도 저렇듯 방치해도 되는가. 광주에서 온 아저씨 한 분이 사당을 꼼꼼히 둘러보며 사색에 잠겼다. 김영현 선생의 말씀과 달리, 행인은 유심하나 정작 후손인 우리가 무심하다.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당인리 해안가에 미소공원을 세운 뜻과 노력을 어찌 작다 하겠는가. 입이 귀에 걸린 듯 활짝 웃는 공원 내 토상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었다. 이래서 미소공원일까. 그러나 건너편 창의사의 쓸쓸한 꼴을 보며 금새 실소가 터지는건 무슨 까닭일까? 미소공원에 미소가 빠진 이유다. 요즘 이상돈과 같은 포악한 관리가 있을 리 없겠지만, 허사겸 선생이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뜻도 결코 작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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