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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끝’이 아니다, 여기서 ‘시작’이다 (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0.06.15 16:12
  • 수정 2015.11.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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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리학적으로 샌프란시스코(미국), 브리스베인(호주), 싱가포르 항과 곧바로 통한다. 또한, 대륙 넘어 파리, 독일, 뉴욕으로 가는 바닷길이 막힘이 없다. 이는 곧 세계의 중심이란 맥락과 상통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200년 전, 그 중심엔 해상왕이란 호칭을 비롯해 ‘무역왕’, ‘해신’으로도 불렸던 장보고가 있었으며, 장보고 또한 청해진 완도가 있어 그 시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듯 세계의 중심인 ‘완도’의 위상을 알리기 위해 전라도 사람들의 삶과 생각이 담긴 월간 ‘전라도닷컴’에 기획특집으로 실린 “여기서 ‘끝’은 아니다, 여기서 ‘시작’ 이다!”를 4회에 걸쳐서 연재한다. -편집자 주-

 

▲노예로 끌려가는 동포를 구하고자,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청해진’ 건설
‘바다를 깨끗하게 한다’는 독자적인 이름을 가진, 장보고가 건설한 해상왕국, 청해진. 청해진은 동아시아 물류 네트워크였고 국제무역센터였다.

청해진 본진이 있던 장도(將島)로 발걸음을 옮기며 활 잘 쏘고 헤엄 잘 치는 소년 장보고를 떠올린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나라를 등지고 바다 건너 이국땅으로 떠날 결심을 굳힌 소년. 야망을 펼치기에 조국 신라는 골품제라는 깰 수 없는 신분차별의 벽이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장보고》의 저자 윤재운(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박사는 “중국은 ‘초재진용(楚材晉用, 초나라의 인재를 진나라에서 상용한다는 뜻)’이 오랜 전통이어서 외국인을 배척하지 않는 풍조가 으뜸이었다. 특히 당나라의 외국인 용병 정책과 인재 등용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장보고는 신라에서 이미 무술로 고수가 되어 당할 자가 없다 했으므로 어느 군대 조직에 들어가도 먹고 살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장보고는 큰 꿈을 찾아 바다를 건넌 것이다.

서른 살쯤 당나라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라는 지휘까지 오른 장보고. 그의 야망은 재당 신라인의 저력을 확신하며 군을 떠나 중국을 두루 돌며 상업 활동에 몰입한다. 윤 교수는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의 경험에서 얻은 군사 전략가다운 소양과 재당 신라인 사회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해, 당대 최고의 국제 해상 무역가로 입신하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한다.

828년(흥덕왕 3년) 4월, 조국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 당시 신라는 ‘170여 명이 중국에 넘어가 양식을 구하려 했고 기근 때는 자식까지 파는 일이 생겼《삼국사기》’을 정도로 위기였다. 당나라에서 신라인 노비화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중국 해적은 신라인을 마구 잡아갔다. 숭실대 김문경(역사학) 명예교수는 “이런 복잡한 난관에 숨통을 틔게 해 준 것이 바로 장보고의 등장”이라고 강조한다. “위기 상황에 있었던 흥덕왕에게 장보고의 등장은 신라 노예 문제를 풀면서 해적을 소탕하고 경제적으로 피폐한 신라 사회를 개선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취약했던 정치, 군사적 후원자를 만들 수 있었으며, 장보고 입장에서는 동포들이 약탈의 대상이 되어 고초를 겪는 상황을 해소하고자 하는 마음과 또한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해상 무역에 대한 포부를 펼쳐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흥덕왕은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할 수 있도록 그에게 유래가 없는 ‘청해진 대사’라는 직함을 주고, 남해안 일대 지역에서 1만 명의 군사를 징발할 수 있는 권한(혹은 당나라에 노예로 있던 신라인을 모아 군사 조직으로 훈련시킬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내어준다.

현재, 장도 앞에는 2008년 완도군에서 건립한 장보고기념관이 장보고의 업적을 되새기고 있고, 물이 들면 들어가지 못하던 장도에는 목교가 놓여 물때와 상관없이 청해진 본영을 둘러볼 수 있게 됐다. 목책을 형상화한 이 다리는 한국공공디자인지역지원재단이 주최한 ‘2009 국제공공디자인 대상’에서 선정되기도 했다. 유물 발굴 이전에는 밭으로만 이용되던 청해진 본진 장도는 토성, 우물, 성문 등 복원작업이 이뤄졌다.

장좌리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유물 발굴 이야기에는 우꾼함이 있다.

“장섬(장도)이 보물섬이여. 여그서 보물이 얼마나 나온 줄이나 안가. 도자기, 장군님 술잔, 밥그릇, 요강, 쇠때(열쇠) 원 없이 나왔어. 몇 트럭이 올라갔어.” “우물 찾을라고 사방 간데를 팠어. 어딘가 꼭 있다고. 가상만 팠다가 대문 앞을 팠는디 땅이 껌하게 나와. 변소인갑다 했는디 발굴한 사람이 샘이라고 딱 알아불던마. 엄청나게 지퍼(깊어). 사람 뼈딱(뼈), 말, 고양이 뼈딱이 몇 가마니 나왔어.”

장도 청해진 유적 발굴은 대사건이었다. 첫 발굴의 공은 태풍이었다. 1959년 9월 17일 몰아친 태풍 사라호가 장도 바닷가의 모래자갈을 쓸어가며 둥그렇게 줄지어 세워진 참나무 말뚝을 드러냈다. 목책(木柵)이었다. 초소 또는 방어시설로 세워졌던 흔적. 이후 내성과 외성의 성곽 흔적이 발굴되고 기와, 토기, 도자기가 발굴되고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실시한 제7차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우물과 접안 시설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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