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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科擧)를 본 땅 고금도(古今島)

선조수정실록, 과거일과 합격자 발표 기록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0.06.22 09:41
  • 수정 2015.11.24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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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완도는 어느 곳 할 것 없이 역사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 들이다.
특히 고금도는 임진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많은 곳이다. 고금도는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마한(馬韓)에 속하였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백제(百濟)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는 탐진현(耽津縣)에 속해있으면서 828년에 청해진(淸海鎭)이 설진되면서 청해진에, 고려시대에는 장흥부에, 조선시대에는 강진현 대구면(大口面) 고금도가 되었다가 본군의 설군으로 완도군 고금면이 되었다.

고금도의 옛 지명은 고이도(皐尓島) 또는 고이도(古尓島)라 표기하였으며, 이후로 고금도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 강진현에는 고이(皐尓)라 썼으며, 신 동국여지승람 편에는 고이도(古爾島라 하였고, 다산시문집 에는 고이도(皐夷島)라고,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고이도(皐夷島)라고 하다가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 처음으로 고금도(古今島)라고 기록되어있다.

우리 완도를 구국의 땅이라고 하지만 특히 고금도는 가히 구국의 땅이라 할 수 있다. 임진전쟁 때인 1597년 8월 18일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회령포(장흥 회진)에 도착하여 10여 척 남짓 되는 전선으로 이진을 거쳐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고 1598년 2월 17일 고금진으로 옮긴다.

고금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노량해전에서 적을 완전히 물리치고 전사한다. 이 때 가리포 첨사였던 이영남도 같이 전사한다. 고금도에 있던 짧은 시일에 무려 8천이라는 수군을 확보하여 임진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노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었던 그 주체수군은 우리 완도의 어민들이었다.

우리들의 선조들은 목숨을 버리면서 조국을 지켜냈다. 이렇게 이름없이 죽어간 우리의 선조에 대해 훗날 조정에서도 알게 되었다. 선조임금은 이렇게 장한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에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다가 1601년 5월19일(선조 34) 그 노고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해진(海陣)에도 각기 일소를 설치하였으니 부산(釜山), 거제(巨濟), 고금도(古今島)에서 과거를 치르게 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선조 36년 1월 1일(1603, 선조수정실록 36년)합격자 명단을 발표하였다.

그 명단을 보면, 정시를 실시하여 문과 이명준 등 10인과 무과 1천 6백여 인을 뽑다. 라는 제목으로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문관(文科) 이명준(李命俊) 등 10인과 무과(武科) 신경유(申景裕) 등 1천 6백여 인을 선발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 해방(海防)에 수고한 사람들을 시취(試取)하여 그들을 위로하여 격려할 터전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는데, 과거를 실시하자 내지(內地, 육지) 사람들이 뒤섞여 응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비웃었다.

이렇듯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렸던 우리 완도인들의 애국심을 나라님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후손들이다. 우리들은....,

이렇게 숭고한 뜻을 이어받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름없이 죽어간 분들의 위령비이라도 세워서 그 뜻을 기리면 한다. /단기 4343년 보훈의 달에 마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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