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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고기 둠벙이었던 안마도”

강제윤 시인- 영광 안마도 기행 - (중)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1.08.18 09:50
  • 수정 2015.11.1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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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빡 파시
저물어가는 안마도 선창가. 꽃게 자망 물을 보고 온 꽃게잡이 배, 선원들이 그물에 주렁주렁 열린 꽃게를 따고 있다. 꽃게잡이 배는 오전, 오후 두 차례 그물을 걷어온다. 안마도에는 10여척의 어선이 꽃게를 잡는다. 어부들은 그물에 열린 꽃게를 사과처럼 조심스레 따낸다. 따낸 꽃게는 집게발 하나씩을 잘라낸 뒤 물 칸에 보관한다. 칠산 바다에 조기가 잡히던 시절부터 조기가 사라지고 부서가 많이 나던 시절까지 나루빡 선창가에는 파시가 섰었다.

부서가 날 때는 아지(전갱이)도 많이 났다. 아지 파시도 섰다. 파시는 30여 년 전에 끝났지만 노인들은 그때가 어제처럼 환하다. 풍랑이 일고 어선들이 피항을 오면 포구에 어선들 수백 척이 꽉 들어찼다. 나루빡 선창가에는 아연 활기가 돌았다. 그때는 나루빡 일대가 온통 술집 천지였다. 색시집도 많았다.

"우다시(풍선) 이끌고 여수, 삼천포 배들도 많이 오고. 왜정 때는 일본 배들도 많이 왔어."

조기 배가 들어오면 부녀자들은 물동이 이고 물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 배들은 선장 가까이 들어오면 바닥에 걸리니까 멀찍이 띄워두었다. 여자들은 배꼽까지 물에 빠지며 물동이를 이고 배까지 찾아가 물을 팔았다. 그 시절에는 포구 앞 바다에도 물고기들이 지천이었다.

"이 안에도 고기가 시글시글 했어. 부서, 민어, 조기, 아지, 안무는 고기가 없었어. 안마도를 고기둠벙이라 했제."
 

 

같은 섬사람들끼리만 결혼했던 섬
지금은 60가구 80여명에 불과하지만 한때 안마도에는 300호 이상이 살았다. 월촌 마을의 강환규(77세) 노인은 15년 전 쯤 새로 집을 지었다. 물자를 뭍에서 들여왔으나 블럭이 조금 부족해서 마지막 한단을 쌓지 못했다. 그래서 집이 낮다. 예전에 안마도에는 강씨들이 많이 살았다 한다.

"순전히 강씨 판이었어. 그때는 주먹 좀 쓰는 사람이 어른 아니었소. 딴 성바지는 큰소리를 못 쓰고 산 게 이 마을이요. 딴 성바지랑 쌈이 붙으면 사촌, 오촌, 육촌까지 다 몰려가서 덤비니 이겨 지겄소. 지금 그런 짓거릴 했다간 큰일 나지."

노인은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멋쩍게 웃는다. 나이 들어 바다 일도 농사도 할 수 없으니 다른 안마도 노인들처럼 노인도 공공근로 사업에 나가 돈을 버는 것이 유일한 경제활동이다.

옛부터 안마도에서는 무슨 이유인지 안마도 사람들끼리만 혼인을 했다. 노인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송이도나 낙월도 등의 섬과 멀지 않지만 서로 혼사를 맺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안마도에 나서 안마도에서 결혼해 안마도에서 아이들 낳고 살다 안마도에 묻혔다. 작은 섬에서만 혼사가 이루어졌으니 다들 친척이면서 사돈이었다. 매형이면서 외삼촌이고 이모면서 형수이기도 했다. 몇 겹의 사돈도 흔했다.
"몇 번 얽혀서 남이 없어라우." 노인의 자식들 대에 와서야 객지 사람들과 피를 섞기 시작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노인은 열다섯 살 때부터 50년간 어선을 탔다. 칠산어장에서 조기가 날 때는 상고선을 타기도 했다. 어선들에서 조기를 사다 법성포에 팔아넘기는 상선. 그때 상고선들은 기계배가 대부분이었지만 노인은 풍선인 상고선을 탔다. 바람이 불어주지 않을 때는 칠산 바다에서 법성포까지 24시간 동안이나 노를 저어 가기도 했다. 칠산어장에서 조기가 사라지면서부터는 유자망 배를 타고 동지나해, 남지나해까지 내려가 조기를 잡아왔다.

노인은 물고기 중에서는 칠산 어장에서 나던 조기가 가장 맛있었다고 기억한다. 대부분 농사를 짓던 안마도 사람들은 조기 철이면 굵은 조기를 사다가 선영에 올린 뒤에야 자신들도 조기를 먹었다. 그것을 '조기 신산'이라 했다. 조기를 집 식구 수만큼 사서 구운 뒤 다른 나물과 함께 올렸다. 그 후에야 식구들 마다 조기를 하나씩 들고 밥을 먹었다. 그때는 조기가 어찌나 컸던지 한 사람이 한 마리를 다 먹지 못하고 남길 정도였다. 조기 신산 때는 그 귀한 쌀밥도 먹었다.

"쌀이 어치케 생긴 줄도 모르고 살다가 그날은 쌀밥에 조기까지 먹었으니"
노인은 조기를 가장 맛있게 먹는 법은 굴비가 아니라고 한다. 굴비는 오래두고 보관하기 위한 것이고. 조기를 "간질(소금 간)해서 한 이틀 널어 물을 뺀 뒤 먹는 게 최고였어. 굴비는 그 맛에 대도 못했지."

칠산어장에 조기가 널렸어도 안마도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할 수가 없었다. 조기잡이 배를 마련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지 사람들이 와서 칠산 바다의 돈을 긁어가도 그저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고기 둠벙'을 앞에 두고도 조기를 사다 먹었다. "사람은 많고 농토는 작고" 작은 섬에서 수천의 사람들이 좁은 농토에만 기대 살아가니 섬은 가난이 일상이었다. 부자라고 해봐야 자기 논 밭 벌어서 안 굶는 정도의 사람들이었다. 자기 농토가 없어서 남의 일 거들어 주고 곡식 얻어다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노인이 어려서는 칡뿌리나 산야의 풀들이 없으면 못살 정도였다. 칡을 캐 돌 위에 놓고 메로 두드려 물에 푼 뒤 체로 거르면 칡 전분이 나왔다. 그 칡 전분이나 마, 무릇, 풀뿌리, 바다의 톳이나 미역 등을 뜯어다 곡식가루 조금 넣고 끓여 먹는 것이 식량이었다. 그래도 노인은 그때가 좋았다고 회상한다.

"누가 집을 지으면 전부 산에 가서 나무 한 짐씩 져 와서 지붕 올리고, 울력도 하고 서로 돕고 살았지. 사람 적게 살면서 외려 인심이 더 사나워 졌어. 지금은 다들 저만 잘 살라고 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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