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기획취재> 서울보다 평양이 가까운 섬

강제윤 시인 - 백령도 기행(상)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1.12.08 09:30
  • 수정 2015.11.11 10:55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 황해 바다는 잔물결 하나 없이 평온하다. 섬으로 가는 통로인 동시에 단절이기도 한 바다. 내일 뱃길을 끊어 놓을지도 모르는 바다가 오늘은 섬으로 가는 통로가 되어 준다. 백령도로 가는 여객선 승객의 반은 군인과 군속들이다. 백령도 거주 인구의 절반이 군인이다.

백령도는 오랫동안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지만 지금은 인천시 옹진군의 부속 섬이다. 인천에서는 229km의 먼 거리지만 북한 장산곶과는 13.5km로 지척이다. 서울보다 평양이 가까운 섬. 백령도는 북한 황해도의 여러 지역보다 위쪽에 있다. 백령도에 가기위해 여객선은 북한 옹진군의 순위도, 어화도, 창린도, 비암도, 기린도, 마암도, 장연군의 월내도, 육도 등을 뒤로 하고 북진해야 한다.

4시간의 항해 끝에 여객선은 백령도 용기포항에 입항한다. 해병대 버스가 새로 전입온 신병들을 싣고 사라진다. 한때 백령도는 대청도 소청도와 함께 홍어 잡이로 유명했다. 1986년에만 배 한 척당 평균 2천 만 원의 어획고를 올렸었다. 홍어가 사라진 것은 남획 때문이다. 예전에는 제주도에서 초청해온 해녀들의 잠수로 수확할 정도로 전복이나 해삼 등 해산물이 했다.

해녀들은 채취한 해산물을 그들을 고용한 어촌 계원에게 시가의 절반에 파는 것으로 대가를 받아 갔다. 한때는 50여명의 제주 해녀가 백령도에 상주 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해산물도 귀해졌다. 그 시절 물질 왔던 해녀들 중 일부는 백령도 남자들과 결혼해서 눌러 살았다. 두무진에 있는 제주 해녀 횟집은 그때의 흔적이다.

백령도에서도 선사시대부터 농경과 어로를 하며 사람이 살았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백령도는 본래 고구려 땅이었다. 옛 이름이 곡도(鵠島). 고구려 멸망 후에는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다. 고려 태조 때 백령도란 이름을 얻었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진을 설치하고 진장을 두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진이 폐쇄되고 주민들은 육지로 이주해야 했 다. 그 후 섬은 왜구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조선 세종 때 잠시 수군 진이 생겼으나 오래지않아 폐쇄되었고 광해군 때 가서야 비로소 다시 백령진이 설치되고 주민들의 재 입주가 허가 되었다. 지금의 면소재지가 있는 진촌리에 백령진이 있었다. 백령 진장인 수군첨절제사에는 정삼품의 당상관이 임명 되었다. 진장은 군사 행정, 사법권을 가진 막강한 권력자였다. 백령지역에서 발생 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즉결 심판권이 부여 되었다. 심지어 죄인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 후 보고만 하면 되는 선참후계의 권한까지 주어 졌었다. 진장 밑에 부장 까지 두고 군관 5인이 항상 호위하고 다녔다 하니 백령진장은 가히 백령도의 군주였던 셈이다.

절해고도의 고립된 공간에서 절대 권력자의 횡포가 막심 했을 것은 자명하다. 이들 권력자들은 조정에서 받은 녹봉을 하절기에 주민들에게 강제로 대여했다. 대여 때는 소두로 주고, 추수철에는 대두로 받아갔다. 또한 해적 토벌을 명분으로 추포무사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선을 끌고 오면 주민들은 간장, 된장 등의 부식까지 제공해야 했다. 해적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관군이고 벼슬아치들이었다.

과거 백령도의 어민들이 관의 수탈에 시달렸다면 근세에는 인천 등지의 물상객주들에게 수탈당했다. 물상객주들은 초봄에 생활 물자들을 대주고 위탁 해산물을 파는 권리를 독점해 폭리를 취했으며 고액의 위탁 수수료와 저울을 속이는 등의 방법으로 어민들을 수탈해 갔다. 육지의 수탈을 피해 섬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었지만 살기위해서는 다시 뭍에 예속 되고 수탈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섬의 운명이었다.

두무진은 백령도의 최 서북단이다. 북한의 장연군 장산곶과 마주보고 있다. 두무진 앞 바다에는 금강산 만물상처럼 형제 바위, 코끼리 바위, 촛대 바위, 신선 바위 등의 기암괴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래서 서해의 해금강이란 이름을 얻었다. 광해군 때 유배 왔던 이대기는 두무진의 풍경에 매료되어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찬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두무진이 오랫동안 왜구와 해적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1802년 간행된 ‘백령진지’는 두무진이 “해로의 지름길이요. 배 대기 편리하여 해적의 출입하는 문지방”이라 기록하고 있다. 백령진이 설치되면서 두무진 앞 높은 낭떠러지 위에 기와로 요망대를 짓고 해적의 출몰을 감시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망을 보던 망대가 있었다. 지금은 해군기지와 초소들이 있다.

두무진 앞 바다의 포식자는 셋이다. 사람과 물범과 가마우지. 물범은 물개와 생김이 비슷하지만 겉으로 돌출된 귀가 없다. 겨울 동안 번식을 위해 중국의 보하이(발해) 랴오뚱만의 얼음바다로 간 점박이 물범들이 봄이 되면 돌아온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물범을 옥복수(玉服獸)라 했다. 당시에도 모피 옷을 얻기 위해 포획됐던 모양이다.

그 때는 서해 전역이 물범의 집단 서식처였다고 전해지지만 지금 물범은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두무진 앞바다에서 물범의 유일한 경쟁자는 가마우지다. 두무진 바위 절벽에 집을 짓고 사는 가마우지들은 물 속 40m까지 잠수해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들인다. 중국에서는 가마우지를 길들여 물고기 사냥에 쓰기도 한다.

북한 영해와 인접한 백령도 바다에는 어로제한선이 있다. 더 많은 어획고를 올리기 위해 어로제한선을 넘으려는 어선들과 단속하는 군이 자주 대립한다. 어로제한선을 넘는 이유는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함은 아니다. 사람들은 갈 수 있는 모든 바다 속의 물고기들을 싹쓸이 하고도 모자라 자주 어로제한선을 넘는다.

누구는 남북의 분단으로 황금어장이 버려지고 있다 탄식하고 선주들은 돈다발을 눈앞에 두고 쓸어 담지 못해 아쉬워 하지만 어로제한선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서해바다의 어족들의 씨가 말랐을 지도 모를 일이다. 선주들에게 금단의 바다가 바다 생물들에게는 생명의 바다로 남았다. 인간의 비극이 바다 생물들에게는 축복인 것이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