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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조기가 떠나자 황금시대는 가고

강제윤 시인 - 연평도 기행 (중)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2.16 00:01
  • 수정 2015.11.1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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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벌어 일 년 먹는 작사판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깊다. 1634년 5월,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출하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잠시 연평도에 정박한다. 간조 때 임 장군이 가시나무를 찍어 안목바다에 꽂게 하였는데 물이 빠지자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수많은 조기가 걸렸다고 전한다. 이것을 계기로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바다의 어업의 신으로 등극했고 연평도에는 임경업 장군의 신당까지 생겼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의 연평도 방문 이전부터 있어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연평도 특산물로 조기가 기록되어 있고 중종실록에도 이미 연평도의 어전을 둘러싼 다툼이 등장한다.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전설은 전설 나름의 생명력을 지닌다. 그래서 전설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파시 철이면 술집 100개 작부만 500명, 일본 게이샤까지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연평도의 여자들도 바빠졌다. 연평도에 정박한 배들은 물과 식량, 장작 등을 보급 받았다. 여자들은 이때를 틈타 물을 팔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갯가에 늘어섰다. 파시 때 연평도에는 요정이나 요리 집 같은 색주가만 100여 집 이상이 생겼다.

한집에 작부가 5명씩은 됐으니 줄잡아 5백 명이었다. 이때가 되면 마을의 가장 앞줄, ‘갱변’ 쪽 집들은 장사꾼들에게 한철 세를 놓고 자신들은 마을 안 쪽 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가정집이 색주가로 바뀌었다. 해변인 ‘갱변’에는 판자로 지은 가건물도 생기고 그곳에도 색주가가 들어섰다.

색주가는 주인의 고향에 따라 인천옥, 목포옥, 해주옥, 군산옥, 비금옥, 위도집, 흑산집 등의 간판을 달았다. 일제 때는 일본 유곽도 있었고 일본 기생들도 많았다. 1930년대 연평파시에는 상점 중에서 요리 집과 음식점이 가장 많았다. 어느 해에는 요리 집에 일본 기생만도 50명이 넘었다. 카페도 있었으며 여관, 대서소를 비롯해 이발관이 9개 목욕탕도 3개나 있었다.

파시 때면 술 담글 줄 아는 주민들은 막걸리와 청주를 담가서 내다 팔거나 색주가에 댔다. 쌀밥은 못 먹어도 술은 쌀로 빚어다 팔았다. 바람이 불어서 피항해 온 배들이 많을 때가 색주가들에게는 큰 대목이었다. 색주가를 비롯한 장사치들은 봄철 조기잡이가 끝나면 미련 없이 섬을 떠났다.

영원할 것 같던 연평도의 황금시대는 갑자기 종말을 맞이했다. 어느 순간 그 많던 조기떼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연평도를 찾는 어선도 상인도 더 이상 없어졌다. 파시는 끝이 났다. 연평 바다에서 조기떼가 사라진 것은 1970년 무렵이다. 비슷한 시기 칠산 어장에도 조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대규모 선단이 어린 새끼들까지 잡아들인 남획의 결과였다. 무차별 포획이 계속되자 멸종의 위험을 감지한 조기떼는 더 이상 사지를 찾아 들지 않고 바다 깊숙이 숨어버렸다.

 "다들 똑 같은 꿈을 꿔요. 전쟁이 나고 포가 떨어지고 도망가는 꿈."
조기가 떠나면서 연평도의 황금기도 끝이 났다. 이제 연평도는 군사적 긴장이 흐르는 작은 섬이다. 북한의 폭격을 받은 뒤에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섬이 돼버렸다. 폭격을 당한 집들 대부분은 철거됐으나 몇 채는 '안보 관광'용으로 허물지 않고 '전시중'이다. 부서진 집들은 처참하다.

군인과 군부대 공사를 하던 인부 몇 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집이 허물어졌는데 주민들의 인명사고는 없었다.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 아닌가. 폭격당한 집 앞에서 궁금해 하고 있는데 근처를 지나던 주민 한분이 그 의문을 풀어준다. 그는 식당을 운영한다고 했다. "마침 여객선이 들어오는 시간이라 동네에 사람들이 없었어요. 천운이었지요."

여객선 시간에 맞춰 주민들은 대부분 선창가로 나갔다. 인천에 다녀오는 가족들을 마중하거나 인천에서 보내오는 물건들을 찾으러 갔던 것이다. 여객선 시간이 아닌 때 폭탄이 떨어졌다면 수십,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끔찍한 재앙이 피해갔다. 그도 물건을 받으러 선창가에 나가 있었다. 처음 폭탄 소리를 들었을 때는 놀라지 않았다. 부대에서 늘 하는 사격 훈련이려니 했다.

하지만 5분 쯤 후 싸이렌이 울리고 방송이 나오면서 실제 상황이란 걸 알았다. 불안이 밀려 왔다. "이제 다 끝났구나 싶었다." 주민들은 해경 배를 타고 밤새 인천으로 피난을 떠났다. 피난을 나갔을 때는 찜질방에 잠을 자면서도 다시 연평도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천금을 준다 해도 들어가기 싫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평도가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자 주민들 대부분이 다시 돌아왔다. "생활 터전이 여기니 해먹고 살게 없는데 어쩌겠어요." 도리가 없었다.

어디 가서 무얼 해먹고 살 수 있겠는가. 먹고사는 일 또한 전쟁이 아닌가. 전쟁을 치를 바에야 살던 터전에서 치러야지. 다행히 그의 집은 폭격을 피했다. 그는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 하지만 포 소리만 나면 가슴이 철렁한다. 폭격 전에는 50년 넘게 포 소리를 듣고 살아왔지만 불안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포 소리 들릴 때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다. 연평도 주민들은 대부분 악몽에 시달린다. "다들 똑 같은 꿈을 꿔요. 전쟁이 나고 포가 떨어지고 도망가는 꿈." 그러면서도 주민들은 설마 하는 기대감으로 살아간다. "한 번 쐈는데 설마 또 쏘겠는가 하는 생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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