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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섬은 능구렁이 울면 비가 왔다

강제윤 시인 - 옹진 덕적도 기행(상)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4.26 11:44
  • 수정 2015.11.1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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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섬은 산이다. 덕적도 도우 선착장에서 진리 고개를 넘다 말고 나그네는 산길로 접어든다. 사람들은 섬에 오면 대체로 해변으로 달려가지만 해변에서는 섬을 볼 수 없다. 산에 올라가야 비로소 섬의 전체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산으로 가면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흙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그네는 뭍에서 온 누구보다 먼저 섬의 속살에 안겨 볼 수 있다.

흙과 나무와 바람의 향기, 숲에서 한번 걸러진 바다 내음도 한결 청량하다. 대체로 섬들의 산은 높지 않은 탓에 가볍게 오를 수 있다. 산길을 오르며 푹신한 흙을 밟는다.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공중의 구름을 걷는 느낌이 이러할까. 사람이 관절이 상하고 자주 무릎이 아픈 것은 걷지 않아서가 아니다. 흙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흙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진리, 덕적면 소재지가 있는 진리 해변 모래밭에서 앞선 여행자들이 남기고간 낙서를 만난다. ‘호식이 바보’, ‘덕적도 관광 왔다. 사랑해’, ‘군 입대 D-18, 사랑해서 미안해’. 군대는 아직도 이별로 가는 특급 열차인가. 남자의 군 입대를 앞두고 섬에 온 연인은 서로의 앞날이 불안하다. 사랑해서 미안하겠는가. 사랑을 지킬 수 없어서 미안한 것이지. 어차피 모래위에 새긴 사랑의 맹세란 한 번의 파도에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바위에 암각한 사랑의 맹서라 해서 영원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의 맹세를 써야할 곳은 어쩌면 모래밭인지도 모른다.

진리 마을 해안 길의 끝에 밧지름 해변과 서포리 해변의 이정표가 서 있다. 서포리 까지는 이십리 길. 해떨어지기 전에 닿을 수 있을까. 서포리 고개에서 해넘이를 만나 잠시 서쪽 바다를 본다. 비가 오려는가 하늘이 붉다. 소년시절 승봉도로 가는 길에 덕적도에 들른 적이 있다. 아니 배가 잠깐 들렀었고, 소년은 배 안에서 서포리 마을을 건너다보기만 했었다. 접안 시설이 없던 때라 여객선은 서포리에 직접 대지 못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잠깐 멈춰 섰다.

당시 많은 섬들이 그랬듯이 서포리에서 종선이라 부르는 작은 목선이 마중 나왔다. 종선은 여객선으로부터 사람과 짐들을 옮겨 실은 뒤 마을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득 세월이 흘렀다.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때 서포리 마을을 건너다보던 소년과 지금 서포리에 있는 어른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밤새 꿈을 꾸었다. 서포 1리 마을 차부 민박집. 주인집 노인이 만든 솔방울 베게를 베고 잔 때문이었을까. 밤새 솔바람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불고, 눈보라치고, 햇볕 따뜻한 봄이 오고, 비가 오고, 밤과 낮이 수시로 교차했다. 소나무에 새순이 돋고, 송화 가루가 날리는가 싶더니 해변은 떠들썩해 졌다. 물놀이 하는 사람들, 솔숲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들, 고기 굽는 냄새, 조개 잡는 아이들, 찬바람이 불고 다시 해변은 텅 비어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꿈이었다. 꿈을 꾼 것은 나그네였을까. 베갯속 솔방울들이었을까.

덕적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삼국 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한강유역의 다른 지역처럼 신라와 고구려에게 번갈아 점령당했던 경계의 땅이었다. 덕적도는 고대 황해 횡단 항로의 길목이기도 했다. 당나라의 백제 침략 때 덕적군도(群島)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의 전진기지였다. 660년, 수륙 9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 침략에 나선 소정방의 당나라군은 4개월간 덕적군도를 13만 군대의 주둔지 겸 군수품 보급기지로 활용했다.

덕적도 바로 옆 소야도에는 당나라군의 진지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남아 있다. 당나라 침략자들은 덕적도에 주둔 했다가 기벌포로 상륙해 신라와 협공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왜구들 때문에 섬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공도(空島)가 되었다.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그런 덕적도가 수려한 경관으로도 이름 높았다.

“덕적도는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뒤에 있는 3개의 돌 봉우리는 하늘에 꽂힌 듯하다. 여러 산기슭이 빙 둘러 쌌고 안쪽은 두 갈래진 항구로 되어 있는데 물이 얕아도 배를 댈만하다. 나는듯한 샘물이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고 평평한 냇물이 둘렸으며 층 바위와 반석이 굽이굽이 맑고 기이하다.

매년 봄과 여름이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산에 가득 피어 골과 구렁 사이가 붉은 비단 같다. 바닷가는 모두 흰 모래밭이고 가끔 해당화가 모래를 뚫고 올라와 빨갛게 핀다. 비록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라도 참으로 선경이다. 주민들은 모두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어 부유한 자가 많다. 여러 섬에 장기 있는 샘이 많은데 덕적도와 군산도에는 없다.” (이중환 '택리지')

과거 덕적도는 덕물도, 득물도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렸다. 면적 20.87㎢, 여의도의 4.5배쯤 되는 큰 섬이다. 2009년 1월5일, 덕적면 전체 인구는 1800명. 덕적도의 인구도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옛 자료에 따르면 1954년 덕적도의 인구는 1만2788명. 한국 전쟁 직후라 피난민의 유입으로 인구가 대폭 증가했다. 원주민과 피난민이 반반. 무속을 제외하면 당시에도 종교는 기독교가 대세였다. 기독교인은 500여명이나 됐지만 절은 선갑도에 하나뿐이었고 그 절에도 신도가 없이 파계승만 1인이 거주했다. 당시 덕적군도 전체에 라디오는 25대였고, 신문은 110부를 구독했다. 인천신문 50부. 연합신문 30부, 조선일보 30부, 신문은 대부분이 유지들과 관공서에서 구독했다. 미군부대도 주둔 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담배 등의 물품을 판매하는 좌판이 2~3개 있었다. 섬에는 의사 3, 한의사 2, 수의사 1명과 의생 3명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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