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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어머니, 그 한없이 따뜻하고 잔혹한 이름

강제윤 시인 - 진도기행(1)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5.17 09:32
  • 수정 2015.11.1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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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버스터미널, 코 앞에서 진도행 버스를 놓쳤다. 이번 일정은 진도의 섬들, 조도, 관매도, 독거도 등을 걸으려 가는 길이다. 자동차나 기차, 배를 놓치는 것이 꼭 그렇다. 많이 늦었다면 아쉬움이 없으련만 늘 몇 분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사람의 인연도 늘 간발의 차다. 단지 일분 늦었을 뿐인데 차는 이미 떠나고 없다. 나그네는 무화과에 한 눈을 팔다 차를 놓치고 말았다. 아니 그보다는 터미널 입구 무화과 노점상 여자의 기이한 행동에 한눈을 판 것이다. 여자는 무화과 판매는 뒷전이고 양동이 가득 물을 떠다두고 무언가 약초 같은 것을 씻는데 몰두해 있다.

“지금 씻는 것이 무슨 약촌가요?”
“임금님이 사약 내리는데 쓰던 ‘초’라는 약초요.”
“근데 그걸 뭐에 쓰시려구요? 어디 사약이라도 먹일 사람이 있나요?”
여자가 빙긋 웃는다.
“치매 걸리면 묵고 죽을라고 그라요.”

내가 살던 섬의 노인들은 환갑만 지나면 다들 ‘시안’을 몰래 지니고 살았었다. 청산가리, 노인들이 그 맹독의 화공약품을 지닌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함이었다. 노인들은 혼자 밥 끓여먹을 기력마저 잃게 되면 자식들한테 피해를 주기 싫어서 약을 준비한다고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 순간이 오면 약을 먹고 목숨을 끊는 일이 흔했다. 스스로 치르는 고려장. 그런데 오늘 목포에서 자신의 고려장을 준비하는 여자를 만났다. 설마 농담이지 싶으면서도 여자의 말에서 진심이 묻어나니 아주 우스개 소리로 들을 수만은 없다.

“그것이 독약으로만 쓰여요? 다른 약으로는 안 쓰고”
“관절에도 좋다 안하요. 다리 아프고 삭신 아플 때 오리나 마른 명태에다 넣고 끓여 먹는다요. 이것만 먹으면 죽으께.”

독은 약이고 약은 독이다. 잘 쓰면 독도 약이고 잘 못 쓰면 약도 독이다. 무릎 관절에 쓰려는 걸까. 여자는 해남의 산에서 약초를 캐서 팔러 다니는 약초꾼에게 5천원 어치를 샀다. ‘초’라는 약초가 목숨을 끊을 정도로 강한 독이라면 사람 목숨 값은 참 싸다. 목숨을 살리기는 억만 금으로 어려운데 목숨을 죽이는 데는 단돈 5천원으로도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여자는 ‘초’를 깨끗이 씻어서 말린 뒤 빻아서 하얀 가루로 만들어 놓을 것이라 한다.

 “풍 오고 치매 오고 그런 거 나도 모른 순간에 와 빌더라고. 그럴 때는 얼릉 이걸 먹고 죽어버려야재. 그래야 자식 안성가시제.”
간난신고를 견디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온 이유도 자식을 위해서였는데 이제 목숨을 버리는 이유도 자식을 위해서다. 어머니. 그 이름이 한없이 따뜻하면서도 잔혹하다.

이제 남도는 본격적인 무화과 철이다. 오늘 여자의 노점에 나온 무화과는 맛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 과실이 빨갛게 익지 않고 퍼렇다. 물론 무화과 잎 그늘 아래서 자란 것은 잘 익어도 파랗지만 대부분은 빨갛게 익어야 달다. 여자도 너무 일찍 따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무화과는 영암의 농장에서 가져왔다. 영암은 무화과의 왕국이다. 영암의 들에는 무화과나무를 심은 곳이 많다. 고추나 콩, 깨 농사 대신 무화과 농사를 짓는다. 무화과는 쌀보다도 10배 이상의 이익을 가져온다.

“농약도 안하고 순만 처 주면 돼. 옆 순 나면 열매가 작아지니까 열매 굵어지라고 순을 처주는 거지.”
농약이 필요 없는 무화과 농사에는 퇴비만 잘 주면 된다. 다른 과수나무에 비해 수확도 빠르다. “요게 3년만 되면 수확을 엄청 많이 해부러. 심음시로 딴당께.”

다른 과일과는 달리 무화과는 햇빛 받아 익는 것이 아니다. 물론 햇빛을 많이 받아야 과육이 단 것은 다른 과일이나 같다. 하지만 먹기 좋게 빨갛게 벌어지는 것은 낮이 아니라 아침 시간이다.

“요것이 아침마다 비 오고 이슬만 맞으면 익어. 밤이슬 먹고 살아. 낮에 가면 딸 것이 하나도 없는데 잠자고 나면 다 익어 있어.”

무화과 장사 30년. 여자는 목포 터미널 앞에서만 무화과 행상을 23~4년 쯤 했다. 무화과 팔아 아이들 가르치고 집도 샀다. 여자는 옛날 영암에 살면서 무화과 농사지을 때는 나룻배 타고 영산강 건너 목포로 무화과를 팔러 다녔다. 영산강 하구언 둑을 막기 전 일이다. 30년 전에도 한동안 무화과 바람이 분 적이 있었다. 그때 무화과 값이 좋으니까 너도나도 다들 무화과를 심었다. 그러다 가격이 폭락하자 또 다들 나무를 파 버렸다.

그러다 다시 값이 오르기 시작하자 하나 둘씩 다시 무화과를 심기 시작했다. 그것이 10년 전 일이다. 또 공급 과잉이 돼서 값이 떨어지면 언제 다시 나무들이 베어질지 모를 일이다. 유자가, 귤이, 복숭아가, 배가 그랬다. 한 가지가 잘되면 다들 몰려들고 그러다 다 함께 망하고. 그것이 과일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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