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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어째 시원한 물 한잔 주라고 말하지 않았소"

강제윤 시인 - 옹진 백아도 기행(하)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7.05 08:27
  • 수정 2015.11.1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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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가 된 학교는 학교마을 고개 넘어 풀숲에 묻혀 있다. 온갖 풀들이 자라나 학교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고개 마루에는 게을러 보이는 개 한 마리, 흑염소 한 마리가 묶여있다. 염소는 배가 부른지 풀을 뜯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먹이보다 낯선 길손에게 더 흥미를 보인다. ‘안녕’ 인사 한마디 건네고 그냥 지나치려는데 쪼르르 뒤쫓아 온다. 소심하고 겁이 많기로 유명한 염소가 낯선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녀석은 드물게 겁이 없거나 지독히도 외롭거나 그중 하나 일 테지. 자전거를 탄 청년 하나가 고갯길을 내려간다. 청년은 휴가나 방학 기간 고향에 온 것일까. 학교 앞 아담한 해변이 아늑하다. 늦은 오후 바다는 금빛으로 반짝이고 파도는 잘게 부서진다.

이 섬도 해안 도로를 내느라 산을 무자비하게 깎아버렸다. 곳곳에 잘려나간 바위산의 상처가 흉하다. 폭파시키려다 만 것인지 어떤 암반에는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뻥뻥 뚫려있다. 자동차가 거의 다닐 일 없는 이 작은 섬 길마저 저토록 넓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필요할까. 섬이든 산골이든 사람이 사는 곳에 길을 내는 것을 시비 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찻길이 필요하면 이 섬의 규모에 맞게 아주 작은 도로를 내주면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자동차가 3대 뿐인 섬에 이토록 넓은 도로를 만든 까닭을 나그네는 납득할 수가 없다. 경제의 효율성을 내세우며 학생 수가 적으면 학교는 가차 없이 폐교 시키는 정부가 자동차 3대를 위해 포장도로를 내주는 것은 대체 어떻게 납득해야 할까. 주민들의 교통은 핑계에 불과하고 도로는 실상 토건업자들을 위한 것이겠지. 토건 공화국의 진면목을 목격한 것 같아 입맛이 쓰다.

섬의 끝과 끝은 걸어서도 30분이면 족하다. 길을 걷는 동안 나그네는 주민들의 차는 단 한척도 만나지 못했다. 공사차량만 한 대 마주쳤을 뿐이다. 쓸모없는 포장 도로 낼 돈 수십억원을 섬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전에는 섬의 큰 마을 이었으나 지금은 작은 마을이 된 부대마을 초입. 대숲에 둘러싸인 오래된 기와집 한 채가 시선을 끈다. 혹시 선단여 바위가 된 오누이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은 아닐까. 행랑채까지 있는 것을 보니 옛적에는 제법 섬의 유지 집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은 전체적으로 많이 기울어 있어 폐가가 다 된 듯하다. 그래도 사립문 밖에 땔감이 잔뜩 쌓여 있고 마당에는 빨래가 걸려 있으니 아직 사람이 사는 것이 틀림없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할머니 한 분이 방안에 앉아 이른 저녁밥을 드시고 있다.

“실례합니다.”
“어디서 오셨소.”
“섬 구경 왔다가 들렀습니다.”
“다 벗고 있는디.”
할머니는 런닝셔츠 바람으로 계신 것이 민망하신지 수줍어하신다.
“어서 식사 하세요.”
할머니가 나오시려는 것을 말리고 집안을 둘러본다. 할머니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 손으로는 연신 부채질을 하며 물에 만 밥을 자신다.
“할머니, 집이 예쁘네요.”
“징글징글 하게 이뻐요. 비오면 새고, 하늘이 보이고.”
할머니는 서러운 말씀도 곱게 하신다.
“비만 오면 다른 집 가라고” 자식들한테 전화가 온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기왓장도 날리고 그런다. 지어진지 백년도 넘은 기울어 가는 낡은 집이지만 마당이고 부엌이고 어디 하나 어질러진 것 없이 단정하다. 마루 밑에는 구들이 있다. 아직도 겨울에는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하신다. 부엌 아궁이에도 가마솥이 걸렸다. 가마솥 옆에는 가스렌지가 놓여있다. 부엌 수도꼭지 아래는 물동이가 놓여 있다. 수도가 들어온 것은 몇 해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평생을 우물에서 물동이로 물을 길러다 먹었다. 수도가 들어 왔어도 버리지 못한 물동이는 할머니의 마음이다.

일흔 여덟, 할머니는 이 작은 섬 이 마을에 나서 평생을 살았다.
“이 마을에 생겨가 이 마을서 늙었어요. 여도 옛날에는 많이들 살았시다. 지금은 다들 죽고 나가고.”
할머니는 다 자신 밥상을 들고 나오신다.
“사람 늙으면 다리나 안 아팠으면 좋겠네. 아이고 힘들어.”
할아버지는 작은 배로 어로를 하다 돌아 가셨다.
“뗏마로, 낚시로 우럭새끼 그런 것 잡고 그렇게 살다 칠십도 못 잡수고 돌아가셨지.”
노인의 오빠들은 젊어서 연평바다에 조기잡이 갔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다. 친 오빠 둘과 사촌오빠 하나 그렇게 삼형제가 한 날 한시 한 바다에서 죽었다. 사나운 태풍 앞에서는 어머니인 바다도 자녀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할머니가 사는 이 낡은 고택은 친정집이었다. 친정 조카들이 살다가 도시로 떠나고 난 뒤 오두막에 살던 할머니가 이주해 왔다. 비가 새는 낡은 집, 선풍기 한 대 없이 부채 하나로 타는 여름을 날지라도 할머니는 여기의 삶이 좋다.
“공기 좋고 여기가 좋지, 아프지만 않으면 좋은데 그게 걱정이야.”
다만 하나 고달픈 노동의 대가로 얻은 육신의 병만이 걱정이다. 어찌할 것인가. 할머니가 부엌에서 병을 들고 나와 시원한 물 한잔을 따라 주신다. 나그네는 벌컥벌컥 들이킨다. 자식 같으셨을까. 안쓰러웠던 것일까 할머니 말씀이 애틋하다.

“어째 시원한 물 한잔 주라고 말하지 않았소. 걸어 오니라 목이 탈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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