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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장보고전(張保皐傳)...〔29〕

(뜻풀이) 김의일 완도문화원 부원장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7.19 09:23
  • 수정 2015.12.08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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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淸海鎭)의 유적지(遺蹟趾)
(5)죽청리(竹淸里)
이와 같이 청해진만(淸海鎭灣)은 지리적(地理的)으로 외적(外敵)이 침공(侵攻)키 어려운 천작(天作)의 군항(軍港)이었다. 다음에 유적상(遺跡上)으로 고찰(考察)하건데 죽청리(竹淸里) 청용등(靑龍墱)이 북(北)으로 통(通)하는 작은 언덕(小峙:소치)이 있다. 이곳을 전말(傳末)로 세칭(世稱)하기를 장군암(將軍岩:장군배기) 바위라는 반석암(磐石岩)이 대 소 합 8개(大小合八個)가 있다. 그리고 또 죽청리(竹淸里) 백호등(白虎墱), 곧 죽청리 안산(案山)에 장사암(將師岩)이라는 반석암(磐石岩)이 있다. 그 넓이가 약 백여 명(約百餘名)의 군중(群衆)이 모여 앉아 쉴(容納:용납)수 있다.

또 죽청리(竹淸里) 사정리(射亭里:사장몰)의 한지역의 경작하는(一地帶耕作田:일지대경작전) 곳으로 정사각형(正四角形)된 밭이 있다. 이곳을 전해 내려오는 설(傳說:전설)에 옥(獄)터라고 한다. 현재(現在)에도 사방둘레(四圍:사위)에 석장(石墻:돌담장)이 유존(遺存)한다. 주(註):장군암(將軍岩)과 장사암(將師岩)의 장사(將師)는 장보고(張保皐)를 지칭(指稱)함이다.〕

이외 장좌리(以外長佐里)와 장좌도(長佐島:장자섬:조금섬) 등(等)의 명칭상(名稱上)으로 고찰(考察)하건데 다음과 같다. 장좌리(長佐里)는 장좌도(長佐島)는 그 명칭(名稱)이 원말(元末)은 장자리(長者里)이고 장자(長者)섬이었을 것이다. 고대(古代)에는 부자(富者)를 장자(長者)라고 호칭(呼稱)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支那:지나)나 우리나라(我國:아국)에 있어서 공통(共通)된 말이었다. 그래서 세칭(世稱) 재산가(財産家)를 백만장자(百萬長者)라고 한다.

그런데 장보고(張保皐)는 무장(武將)으로만 당(唐)나라와 일본(日本)과 아국간(我國間)에서 그 명성(名聲)이 신양(설揚)되었던 뿐만 아니라 당(唐)과 일본(日本) 등지(等地)에 무양(貿昜)을 상행(商行)한 결과(結果)에 치부(致富)하게 되었다. 곧 백만장자(百萬長者)라까지 호칭(呼稱)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장자명(長者名)을 따서 지명(地名)에 붙었다. 예를 들면 현 남경시가(現南京市街)의 한 중앙로(中央路)를 중산(中山) 로(路)라고〔손일산 (孫逸山)의별호(別號)〕한다.

이와 같이 장보고(張保皐)도 역시(亦是) 그 부력(富力)을 의빙(依憑)하여 그 본거지(本據地)인 처소(處所)의 명칭(名稱)을 『장자(長者)』 리(里) 또는 장자도(長者島) 군사요충지(軍事要衝地)라고 하였을 것이 의심할 여지가(無疑:무의)없는 일이다. 필자(筆者)가 단기(檀紀) 4289년 3월 중(四二八九年三月中)에 구 친우(舊親友)인 문창주형(文昌周兄)을 우년(隅年)만에 장자리(長者里)에 심방(尋訪)하였다. 동 친우(同親友)의 소개(紹介)로 그 동리(洞里) 모청년(某靑年)을 안내(案內)로 하여 장자리(長者里)를 답사(踏査)하였던바 그 결과(結果)는 다음과 같다.

장자도(長者島)는 장자리(長者里)의 남부(南部)에 연번(連繁)되어 동(東)쪽으로 청해만(淸海灣)의 서북해안(西北海岸)에 돌기(突起)하여 있다. 주위(周圍)는 약 6천간(約六天間)쯤이나 되고 해발(海拔)은 약 7, 80(約七.八十)미터 가량이나 되고 도형(島形)은 대개 타원형(楕圓形)으로 볼 수 있다. 서북(西北)쪽은 정상(頂上)으로부터 해안(海岸)에 향(向)하여 저함(低陷)하여서 동남(東南) 바다 쪽에서는 잘 볼 수가 없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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