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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감옥 간 사람들 생각에 겨울에도 이불 덮지 않았던 소안도

강제윤 시인 - 완도군 소안도 기행(하)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7.19 10:55
  • 수정 2015.11.1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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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등에 의해 주도 됐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스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후일 송내호는 서울청년회와 조선 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정남국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외딴 섬 소안도에 항일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화 학원'과 '사립 소안 학교’란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 학원'은 1913년 송내호, 김경천 등에 의해 설립됐다. '중화학원’이 '사립 소안 학교'의 모태가 됐다.

1905년, 궁납전이던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 한 것은 사도세자의 5세손 이기용 자작이었다. 소안 주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1909년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무려 13년 동안이나 법정투쟁을 해 1922년 2월에 승소했다.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소안 사립학교를 세웠다. 당시 소안 학교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924년, 2차 소안 노농대성회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소안도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을 큰집처럼 드나들었었다. 1920~~1930년, 소안도 관련 신문보도 기사만 200 건이 넘고 등장인물은 수 백 명에 달한다. 기록만으로도 뜨거웠던 항일의 열기가 짐작된다. 그때 감옥으로 끌려간 주민들을 생각하며 섬사람들은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으며 일제의 경찰에 말을 하지 않는 '불언 동맹' 등으로 일제의 폭압에 맞섰다. 1927년, 마침내 일제는 해방운동의 저수지였던 소안학교 강제 폐쇄 시켰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소안도 항일 운동의 역사는 오랜 동안 잊혀져 있었다. 친일파가 득세한 해방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 운동 참여한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은 숨죽여야 했다. 송래호 선생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 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1928년, 일제하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안도 항일 운동의 역사는 1990년 소안면 비자리에 항일 독립 운동 기념탑이 세워지면서 비로소 복권됐고 해방 60년이 넘은 최근에야 독립운동 기념관이 들어섰다.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다.

완도 향교지는“다른 지역에 비해 기개가 용맹하므로 외부인들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되어 사람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해서 소안(所安)이라 했다”고 소안도의 지명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소안도 사람들의 그러한 기질이 소안도를 항일 운동의 메카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죽음
한참 휴가철이지만 소안도의 미라리 해수욕장은 한가하다. 피서객은 20여명 남짓이나 될까. 주민들이 차린 계절 음식점에는 손님 하나 없다. 대부분이 먹을 것을 차에 싣고 오기 때문에 피서객들이 섬에서 쓰고 가는 돈은 거의 없다.

“주민들은 관광객들 별로 안 반가워해요. 갈아주는 것도 없고. 흔적이 너무 커요. 그런 흔적 치우다보니까 짜증만 나는 거죠. 전복, 김발 해서 안 그래도 먹고 살만한디.”

주민들은 섬에 보탬이 되지 않는 피서객들이 마뜩치 않은 듯하다.
“지금은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서울서 싣고 와요. 물 한 병도 안 사먹고. 보리차물 끓여와 빌고.”

설령 관광객들이 섬에 와서 돈을 쓰고 간다 해도 이익을 보는 것은 일부 숙박업자나 상인들 뿐이다. 나머지 주민들에게는 털끝만한 이익도 없다. 오히려 고달플 뿐이다. 피서철이면 마을 도로변의 풀을 베고 피서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모두 주민들 몫이다. 해수욕장을 나와 미라리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마을 할머니들 몇이 모여 앉아 걱정스런 한숨을 짓고 있다.

“여그까지 와 갔고 죽을라고 그랬으까.”
“아따, 아따, 아따 아그들.”

간밤에 마을 방파제에서 낚시 하던 사내가 실종 됐다. 데리고 온 아이들은 차에서 잠이 들고 사내는 밤낚시를 하다 실족사한 것이다. 아직 시신을 찾지 못했다.

“아따, 아따 뭔 일이까잉.”
“아따, 아따 아그들은 얼마나 미치가까잉.”

사내는 어떤 사연이 있어서 아이들만 데리고 이 먼 섬까지 왔던 것일까. 이제 아이들은 어찌 살아야 할까. 할머니들은 모두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한다.

“그란블로, 그란블로, 아들네, 아들네 불쌍해서 어짜가이.”

문득 세계가 낯설어 진다. 우리는 결코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하나의 세계가 소멸했지만 다른 세계는 변함이 없다. 나그네는 여전히 숨을 쉬고 홀로 길을 간다. 푸른 바다, 어선들, 김 양식 준비를 하는 어민들, 집과 자동차들, 두런거리는 노인들, 부모 손을 잡고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해변의 아이들 깔깔 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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