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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넷 불심검문 아직도 덫이 남아 있다

김주언 전 한국기자협회장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8.30 11:05
  • 수정 2015.11.18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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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실명제의 폐지에 대해 인터넷 사업자는 물론, 시민사회와 누리꾼들도 환영 일색이다. 헌재의 전원일치 위헌 결정으로 인터넷 생태계를 왜곡시켰던 대표적 '갈라파고스 규제'가 사라졌다는 데 대해 뒤늦은 조치이지만 다행이라는 반응이다.

그러나 유독 깊은 우려를 표하는 집단들이 있다. 익명을 앞세운 악성 댓글이 인터넷 공간을 또다시 혼탁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이다. 인터넷 실명제를 앞장서 도입하고 이를 통해 기득권을 누렸던 집단이기도 하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의 현병철 위원장과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가 대표적이다. 현 위원장은 인권위 내부에 실명 게시판 설치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표현의 자유를 모르는 인권위원장'이란 비난을 자초했다.

그는 "익명으로 받으니 비방성 글이 많아서 안 되겠더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원내대표는 "인터넷 실명제 위헌판결 문제는 보통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넷 문화수준이 매우 낮은 상태에서 그나마 실명제로 어느 정도 견제되는가 했더니 위헌판결을 받아 철저한 보완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줄 것을 정부에 촉구한다"고 밝혀 논란을 자초했다.

왜 인터넷 실명제의 폐지에 인권위원장과 여당 원내대표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걸까. 아마도 국가가 댓글 쓸 자격을 부여해야만 악플 등 부작용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권위주의적 발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국민의 기본권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한 걸까. 과거 기득권의 이익을 즐겨왔던 군사독재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자율규제'라는 민주주의 방식에 익숙하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도입된 지 5년 만에 퇴출당할 운명에 놓인 인터넷 실명제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부끄러운 제도였다. 하루 방문자 10만 명 이상의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쓰려면 실명을 확인하도록 의무화한 '제한적 본인확인제'(인터넷 실명제)는 세계적으로도 웃음거리가 됐다. 세계에서 인터넷 실명제를 적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인터넷 검열국'으로 낙인찍힌 중국마저 도입을 검토한 적 있을 뿐이다. 세계 유수의 언론들도 인터넷 실명제를 이유로 한국을 조롱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9월 "한국에서 실명을 강요하는 정책이 멍청한(lousy) 아이디어라는 걸 입증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온라인에서의 익명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개인정보보호 차원이 아니라 아랍의 반정부 시위에서 보듯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반대 의견을 표명하거나 기업의 기밀을 폭로하려는 내부고발자에게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현실의 세계는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우며 익명의 개인들로 넘쳐난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로 내버려두는 게 좋다." <뉴욕타임스>의 설명이다.

인터넷 실명제는 인터넷 이용자들이 타인들과 익명으로 소통할 자유가 공권력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참여연대는 "표현의 자유가 핵심적으로 보호하려는 것은 권력자나 다수로부터 핍박받는 표현이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표현은 아니다"라며 "익명은 시대의 편견이나 권력자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익명으로 말할 자유는 표현의 자유라는 규범이 보호해야 할 대상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익명의 글쓰기는 '사상의 전파'라는 공익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따라서 부작용이 있더라도 역사적으로 보호되어 왔다.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헌법이 표현의 자유를 명시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가 강제하는 인터넷 실명제는 헌법적 가치를 무시하고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심대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실명을 확인받은 후 의사표현이 가능해지면 '자기검열'로 실질적 사전검열에 해당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사생활 비밀의 침해는 물론, 신상정보를 영장 없이 수사기관에 통보하여 개인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다.

흔히 실명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치적 약자나 소수자가 정치적 보복이나 차별의 두려움 없이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권력을 비판할 수 있도록 보장하려면 익명으로 이뤄지는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 "인터넷 실명제는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문제가 된 글을 누가 썼는지 색출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는 지적이 타당성을 갖는 이유이다.

익명은 가짜, 거짓, 무책임이며 실명을 밝혀야 진짜, 진실, 책임이라는 발상은 통제자의 발상일 뿐이다. 인터넷 실명제가 폐지되면 인터넷 공간은 온갖 욕설이나 허위사실, 음란물 등으로 '쓰레기 처리장'이 될 것으로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서 든 두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노파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실명제가 폐지되더라도 자율규제에 맡기면 부작용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리꾼의 '집단지성'이 게시판에서의 부작용을 줄이는 데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집단지성의 힘으로 명예훼손이나 허위정보 등이 사라진 경우도 많다. 자율규제의 방식으로는 '소셜 댓글'을 이용하는 방식이 제안되기도 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계정과 연동해 글을 올리는 소셜 댓글을 통해 누리꾼 스스로 정제된 표현을 쓰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명예훼손 피해자의 댓글삭제 요청이 있을 경우 사업자들이 소명이나 입증자료 없이도 곧바로 글을 내려주는 등의 방식이다. 인터넷 사업자들은 품질 경쟁력과 기업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안전한 서비스와 건전한 사용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인터넷 실명제의 사실상 폐지로 한국이 '인터넷 감시국'이라는 오명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표현의 자유'가 한 단계 진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인터넷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선거기간 중 인터넷 매체 게시판에 글을 남기려 할 때나 청소년이 인터넷에 접근하거나 게임을 즐길 때는 아직도 신분을 밝혀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인터넷 실명제의 폐기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방송통신위원회는 업계 자율적으로 인터넷 실명제를 운용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온라인 불심검문'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많은 장애물이 남아 있는 셈이다.

따라서 다른 법률에 들어 있는 인터넷 실명제도 폐기해야 한다. 선거법의 인터넷 실명제와 게임 실명제는 폐기대상이다. 사업자들이 실명제를 이유로 이용자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해온 관행도 즉각 중단해야 한다. 특히 비밀리에 고객정보를 수사기관에 유출하는 관행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진보네트워크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시행 중인 신용정보업체들과 이동통신 사업자에게 주민번호를 수집·이용하도록 보장한 정책도 명분을 잃었다"며 "인터넷 기업들의 주민번호 수집과 이용을 즉시 중지하고 보관된 주민번호는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명제가 폐지되더라도 인터넷상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나 게시판 관리·운영자에게 특정 표현을 문제 삼아 시정요구를 명령할 수 있는 심의권한도 그중의 하나이다.

지난 2월 방통심의위의 인터넷 게시물 삭제 및 시정 요구는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해서도 '행정기관의 심의규제에 의한 사실상 검열'이라는 비판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헌재는 당시에도 '재판관 5 합헌, 3 위헌'으로 합헌을 결정했을 뿐이다.<뉴욕타임스> 등 외국 언론들이 한국을 '인터넷 검열국'으로 보도하는 이유도 방통심의위의 인터넷 게시글 삭제나 접속차단 조치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민주주의가 번성한 한국에서 인터넷에 대한 철저한 검열이 이뤄지고 있다"며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뒤부터 감시가 강화했다"고 꼬집었다. 이 신문은 "인터넷 게시글 삭제나 접속차단 조치가 2008년 1만5000건에서 지난해 5만3000건으로 약 3배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2MB18nomA'라는 트위터 계정을 접속차단 당한 송 모 씨와 페이스북에 '가카새키 짬뽕'이라는 사진을 올려 재임용에서 탈락한 서기호 통합진보당 의원을 대표적 사례로 소개하기도 했다.이에 따라 시민사회는 방통심의위의 통신심의를 폐지하는 법안을 제정하기 위해 나섰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인권센터,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여연대는 "방통심의위의 통신심의는 과잉·졸속·자의·정치 심의로 인터넷상의 표현물에 대한 실질적인 검열제도로 활용될 수 있다"며 통신심의를 폐지하고 사법심사로 전환하는 입법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행정심의가 아닌 사법심사로 표현물 유통규제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처럼 법원의 판단에 따라 사후처벌을 통한 자율규제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방통심의위가 심의대상으로 삼고 있는 불법정보 유형 중 '명예훼손 정보', '사이버 스토킹 정보', '국가기밀 누설 정보',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삭제의 판단 주체는 법원으로 넘기면 된다.

또 '청소년 유해 매체물 표시의무 등 위반 정보'와 '사행행위 정보'는 각각 청소년보호위원회와 사행성 산업 통합감독위원회로의 이양하여 전문성을 가진 곳에서 심의할 수 있다. '음란정보'는 사업자 또는 이용자 단체들의 자율심의로 차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는 이제 한고비를 넘었을 뿐이다.

 인터넷 실명제의 폐기를 두려워 하는 집단은 또 다른 '옥죄임 법안'을 만들기 위해 고심할지도 모른다. 마침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인터넷 공간이 '쓰레기 처리장'처럼 되면 이를 빌미로 규제법안을 마련하려 할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리꾼이 합심·단결해야 한다. 인터넷 공간을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표현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자세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 필자 김주언은 <한국일보> 기자 시절이던 1986년, <말>지를 통해 전두환 정권이 각 언론사에 하달한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해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누설, 국가모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이 사건은 국내는 물론 영국과 미국의 인권, 언론단체들에까지 알려져 석방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검찰의 무리한 법적용은 9년여의 재판과정 끝에 무죄 확정판결로 이어졌다. 김주언은 이후 한국기자협회 회장,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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