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기획특집> 괴뢰 섬을 아시나요?

강제윤 시인 - 강화 서검도, 미법도 기행(상)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11.29 08:19
  • 수정 2015.11.11 10:45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화군 서검도와 미법도 사이에 괴뢰섬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볼음도에서였다. 민통선 안에 있는 미법도나 서검도, 볼음도는 지척간의 섬들이다. 서검도 앞 바다로 침투한 남파간첩이 그 섬에 숨었다가 도주한 뒤부터 섬의 이름이 괴뢰섬으로 바뀌었다 했다. ‘괴뢰’란 호칭은 북한정권을 소련의 꼭두각시로 보던 시대의 산물이다.

외포리 여객선 터미널에 앞에 서 있는 안내지도 하나에는 괴뢰섬이란 지명이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지도에는 괴리섬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여객선의 선원들이나 서검도, 미법도 주민들, 면사무소 공무원들 누구에게 물어봐도 괴뢰섬에 대해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다. 지도에까지 표시되어 있다는 것은 한때 그 이름으로 불렸다는 분명한 증거인데 다들 모르겠다니 어찌된 연유일까.

괴뢰섬 혹은 괴리섬은 미법도에서 서검도로 가는 항로 중간에 있는 무인도다. 지금은 한전 송전탑이 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삼산면지'에 따르면 괴뢰섬은 본래 귀아리섬이었다. 한자로 옮기면서 귀하도(歸下島)가 됐고 그것이 괴뢰섬으로 바뀌었다가 남북관계가 유화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괴리섬으로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강화군의 크고 작은 섬들은 어느 곳 하나 남북대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없다. 북에서 넘어오던 잠수함이 몇 번이나 발각 된 곳도 서검도 앞 바다다. 미법도 북쪽의 기장섬도 본래는 7가구가 사는 유인도였다. 자생하는 기장이 많아 기장섬(黍島)이었다. 근해에 어족이 풍부해 한때는 풍요를 구가하던 섬. 기장 섬 앞바다 새우잡이 배의 불빛들, 서도어등(黍島漁燈)은 교동팔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장관이었다. 이 섬도 무장 간첩 사건 뒤 소개되어 무인도가 됐다.

미법도와 서검도로 가는 길은 멀다. 강화 본섬에서 바로 이어진 직항로는 없다. 외포리에서 석모도로 건너온 뒤 다시 하리 포구까지 이동해야 한다. 하리 포구에서 아침, 저녁 한 번씩 정기 여객선이 뜰 뿐, 군의 허가 없이는 그 흔한 대절선도 다니지 못한다. 하리포구에는 여객선 매표소만 달랑 하나, 주변에는 인가 한 채 없이 황량하다.

석모도 하리 선착장에서 출항한 여객선은 10분 만에 미법도에 도착한다. 석모도와 지척이지만 교통이 불편한 미법도는 낙도다. 옛날 미법도는 서검도와 함께 외국으로부터 온 배들을 검문하던 곳이다. 섬에는 후손 없는 묘지가 많다. 외래 선박들이 항해 중 사망한 이들을 섬에 매장하고 떠난 까닭이다. 인근의 섬들처럼 섬은 본래 어업이 주업이었으나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면서 어로에 제약이 많아져 어업은 쇠퇴하고 농업이 주업이 됐다.


1965년 10월29일, 갯벌에서 조개잡이 하던 어민 100여 명이 북한 경비선에 의해 집단 납북 됐다가 11월20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사건이 있었다. 모두가 미법도 주민들. 어민들은 경찰서 조사 후 풀려났다. 그로부터 10여년 후인 1976년부터 미법도에서 연달아 다섯 차례의 고정간첩 사건이 터졌다. 납북 됐다 돌아온 어민들이 줄줄이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으로 갔다. 섬은 공안의 칼바람에 초토화 됐다. 그중 한 어민은 ‘인천 제철 폭파 공작’의 혐의가 씌워졌다. 그 어부는 마을의 민방위 소대장이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그를 간첩으로 만들었다.

1982년, 남산의 대공 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온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맞았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부인까지 잡아다 고문했다. 납북 당시 평양에서 친척에게 포섭돼 강화도 인근 경찰서의 위치와 교통편 등 국가기밀을 탐지하는 간첩활동을 한 것으로 조작됐다. 어부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5년을 복역했다. 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납북어부 간첩' 정영씨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 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월이 흘렀지만 남파간첩 사건이나 납북어부 간첩 사건 등은 섬 주민 대다수에게 여전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일 것이다. 괴뢰섬에 대한 기억도 그러한 것일까.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 미법도에 대한 기사가 하나 있다. 사간원에서 사복시(司僕寺) 서리(胥吏) 탁주한(卓柱漢)의 부정을 밝히며 처벌을 요구했다. 국가에서 필요한 말을 관리하는 관청인 사복시 관리 탁주환이 강화(江華) 미법도(彌法島) 둘레 8리의 목장을 폐현(廢縣)으로 문서에 올려놓고 세금을 모두 착복했다는 것이다. 탁주환은 석모도 목장의 세금도 착복했다. 하지만 탁주환은 처벌 받지 않았다. 조정에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었었던 때문이다.

미법도 백성의 세금을 착복한 관리가 처벌 받지 않았던 것처럼 죄 없는 미법도 어부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자들 대부분은 지금껏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있다. ‘조정’에 그들을 비호하는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인가. 썰물 때를 기다리던 미법도 사람들 몇이 해안을 돌며 소라를 줍고 있다. 한 때 100여명이 넘게 살던 섬에 이제는 겨우 10여 가구의 노인들만 남았다.
“소라가 안 붙더니 오늘은 좀 붙었네.”

노인들은 농사짓는 틈틈이 소라도 잡고 굴도 깨다 가계에 보탠다. 여기서 주운 소라는 석모도나 강화로 내다 판다. 가격은 1킬로에 4천5백 원 선. 들물 때가 되자 영감은 소라를 들고 마을로 돌아가며 소라 줍는 할멈을 부른다.

‘안 들어가.“
“나 굴 찍을 거예요.”

굴을 깨는 것을 여기서는 ‘찍는다’고 한다. 영감은 경운기를 몰고 마을로 돌아가고 할멈은 굴을 찍어 저녁 찬 거리를 장만한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