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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불국토로 떠나는 여행, 통영 욕지도

강제윤 시인 - 통영 욕지도 기행(1)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3.28 12:36
  • 수정 2015.11.1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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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늙도록 섬을 못 떠나고
"혼자 오셨는가예?"
"예"
"혼자 오면 외로울 낀데."
욕지도 제암 마을 언덕빼기,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할머니 한분 마늘 밭을 매고 계시다. 할머니는 욕지도에서 태어나 욕지도 남자와 결혼해 살았다. 섬이지만 내내 농사만 지었다. 딸만 다섯을 둔 딸부자. 아이를 가지고도 밭일을 쉬지 못했다. 평생 밭만 파고 살았다. 섬 살이가 하도 고달파 젊어서는 섬을 떠나고 싶은 적도 많았다.

"후회가 왜 없겠어요. 남들처럼 객지 나가서 남편 벌어다 주는 돈 받아 편히 살았으면 좋았겠지. 평생을 섬에서 갇혀 살았어요. 요 땅에서 나서 요 땅에서 늙어 죽게 됐지요. 아이가 늙도록 섬을 못 떠났네요. 농사짓고 애 키우고 살다보니 평생 잠깐이데요.”할머니의 말씀이 서글프다. 그렇게 잠깐 사이 한생이 갔다.

연화욕지두미문어세존
통영은 섬나라다. 그래서 사람들은 통영을 바다의 땅이라 부른다. 통영 바다에는 526개의 섬이 있고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4개. 통영의 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들이 모여 연화열도를 이룬다. 연화열도의 중심 섬인 욕지도는 그 중에서도 최고의 비경을 자랑한다. 통영항에서 32km, 한 시간 거리의 뱃길이다. 청보석의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과 여들. 욕지도 바다의 풍경은 한편의 산수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아름답다.

욕지도는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탁 트인 남태평양 바다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다도해의 소담함과 대해의 장쾌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섬이다. 욕지도를 본섬으로 하는 욕지면은 10개의 유인도와 45개의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욕지도에 면소재지와 각종 관공서가 위치해 있다. 욕지도에는 45개 마을 2000여명이 살고 있다.

각종 욕지도 관광 안내서에는 욕지(欲知)의 뜻을 ‘알고자 하는’으로 풀이해 놓고 있다. 무얼 알고자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그냥 글자 뜻풀이 일 뿐 욕지도란 이름의 진짜 의미를 풀이해 주지는 못한다. 욕지도의 뜻은 그 자체로는 결코 풀이될 수 없다. 욕지도 한 섬만으로도 풀이가 되지 않는다. 욕지도의 뜻은 주변의 다른 섬들, 연화도, 두미도, 세존도 등의 섬들과 연계될 때 비로소 실마리가 풀린다.


욕지도를 비롯한 이들 섬의 이름은 “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욕지연화장두미문어세존”이라는 불경 구절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연화세계(극락세계)를 알고자 하는가? 그 처음과 끝을 부처님께 물어보라.” 옛날 욕지도를 비롯한 연화열도의 섬들은 스스로 이미 연화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이름은 불국토, 이상향을 염원하는 누군가의 기획 하에 지어진 것처럼 아귀가 맞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이름의 섬들이 통영바다에만 몰려있을까. 근처의 미륵도와 반야도 또한 이 불국토의 자장 안에서 지어진 이름이리라.

욕지도와 그 옆의 작은 섬 상노대도에는 신석기 시대 유물인 조개무지(패총)가 있다. 조개무지에서는 각종 석기와 화로, 기왓장, 금불상 등과 함께 인골 2구도 발견된 바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욕지도 일대의 섬들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삼한시대나 가야시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도 사람살이가 이어졌을 것이다. 가야시대에는 6가야 중 수로의 막내 동생인 말로가 지배하던 소가야 소속이었다. 하지만 왜구의 등살에 공도정책이 실시된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의 거주가 허가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주로 군선들의 정박지로 이용됐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왕실 궁례부의 명례궁 소속이었다. 욕지도 수군들이 사슴을 잡아 녹용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산에 올라야 섬의 진면목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욕지란 지명이 태종 때부터 등장한다. 그만큼 오래된 이름이다. 욕지도에 공식적인 사람들의 입주가 허락된 것은 조선시대 말에 와서다. 1887년(고종 24년) 조정에서 욕지도 거주 허락이 떨어졌고 1888년 20여명의 사람들이 처음 입도했다. 1988년에는 욕지개척 100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개척 당시에는 사슴이 많아서 녹도라 불리기도 했다. 개척자들의 구전에 따르면 입도 당시 욕지도에는 전함이 계류하던 곳인 전선소, 관청인 치소, 손님의 숙소로 쓰던 관소가 있었고, 산정에는 위급을 알리는 봉화대도 있었다. 아직껏 남아 있는 조선포나 관청마을, 옥섬 등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 듯 보인다.

욕지도는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했다. 특히 멸치의 주산지였다. 솔가지에 불을 켜서 멸치를 유인한 뒤 잡는 챗배 멸치잡이가 욕지도의 전통 어법이었다. 일제 때는 고등어 전갱이 등으로 풍어를 이루었고 남해안의 어업전진기지였다. 당시 욕지도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서울, 마산, 일본, 만주 등지로 수출 됐다. 일제시대인 1915년경에는 조선인 2만864명, 일본인 2127명 등 인구가 2만3000명에 이를 정도로 섬이 번창했다.

지금 욕지도는 잡는 어업보다는 기르는 어업이 중심이다. 욕지 내항은 돔, 우럭 등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가득하다. 또 욕지도에서는 처음으로 고등어 양식이 시작되어 성공했다. 서울 등 뭍에서 먹는 고등어회는 거의 욕지도 산이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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