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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통일 신라 금동불상이 발견된 섬

강제윤 시인 - 통영 우도, 두미도 기행(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6.20 08:35
  • 수정 2015.11.1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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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세계를 알려거든 부처님께 물어보라
두미도는 통영시에서 남서쪽으로 34㎞ 해상에 있는 섬이다. 두미도의 남쪽에는 갈도(葛島), 동쪽에는 노대도와 욕지도가 있다. 섬은 크게 두미북구와 두미남구로 나누어진다. 두미북구에는 설풍리·고운리·학리·사동이 있고, 두미남구에는 구전·청석·대판 마을이 있다. 두미도는 면적 5.023㎢, 해안 선 11km의 작은 섬이지만 섬의 산은 높다. 섬 중앙의 천황산은 467m나 된다. 천황산 기슭에 마을들이 위태롭게 들어 서 있다.

두미 북구 마을도 급경사에 집들이 층계마다 서 있는 형국이다. 마을을 오르는 길이 곧 등산로다. 몇 그루 밀감나무에서는 거두지 않은 밀감들이 그대로 말라 간다. 노지 밀감은 신맛이 강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손도 대지 않고 버려둔 것이다. 신 것을 좋아하는 나그네는 밀감을 따서 허겁지겁 배를 채운다. 마을의 산 중턱 쯤에 붉은 벽돌 건물 한 채가 언뜻 보인다. 마을의 당집이라도 되는 걸까. 풀숲을 헤치고 건물에 들어서 보니 옛날 디젤 발전소 건물이다. 해저케이블로 전기가 들어오면서 발전소는 폐쇄됐다.

두미도에는 60여 호의 주민들이 산다. 남구와 북구에 각각 반씩 나뉘어 살지만 마을은 북구가 약간 더 크다. 고기잡이가 주업이다. 파도를 막아줄 지형이 없어 양식업은 불가능하다. 주민의 80% 이상이 노인들이니 농사를 짓기 어렵다. 비탈 밭에 경운기가 들어갈 수 없어 섬에 두 마리 뿐인 소로 밭을 갈기도 하지만 그도 여의치 않으면 괭이로 직접 일궈야 한다. 농사의 고통이 심하니 겨우 마늘이나 고구마를 심어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정도다.

두미도는 통영시에 속한 섬이지만 주변의 욕지도나 노대도 사람들과 달리 섬사람들의 생활권은 삼천포다. 통영보다 삼천포가 더 가까워서가 아니다. 100여 년 전, 남해 출신 사람들이 처음 두미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남해 사람들은 또 대처인 삼천포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두미 섬사람들도 자연히 삼천포로 핏줄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오일장도 삼천포 장을 보러 가고 수산물도 삼천포에 가서 판매한다. 삼천포는 4, 9장. 오일장 날에는 통영에서 오는 바다랑 호가 삼천포까지 항로를 이어준다. 결혼식도 남해나 삼천포에서 한다. 아이들 교육도 삼천포에서 시킨다.

지금은 섬에 절이 없지만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불교 신자다. 교회가 있어도 신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욕지도나 노대도 주민 80% 이상이 기독교 신자인 것과는 정 반대다. 민박집 주인은 돌아가신 어른들에게 두미도가 본래 둔미(屯彌)섬이었다고 들었다 한다. 조선왕조 실록에도 둔미도로 기록 되어있다.


미륵이 머물다간 섬. "연화세계를 알려거든 세존께 물어보라"(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 경전 속의 두미(頭尾)든 둔미(屯彌)든 두미도는 연화도 등과 함께 남방 불교의 자장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섬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937년 두미도의 천황산 감로봉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 입상이 발견되었다. 불상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회수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남해 금산에서 세존도, 두미도, 욕지, 연화도를 거쳐 미륵도까지 남해의 섬들은 이미 신라 때부터 불국토를 지향했던 것이다.  

4일, 삼천포 오일장이 있는 날이라 섬은 아침부터 부산하다. 통영에서 들어온 배가 섬사람들을 삼천포장까지 실어다 주고 장을 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실어올 것이다. 민박집 안주인도 객의 아침 밥상을 차려 놓고 장을 보러 갔다. 바깥주인은 고기잡이 나갔다. 이번 겨울 두미도에서는 도다리와 물메기(곰치)가 많이 잡힌다.

마을 회관 앞에는 두미 개척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다. 1996년에 세워졌으니 그로부터 또 12년이 지났다. 오랫동안 비워졌던 섬에 다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세월이 그리 길지 않다. 여러 섬들을 다녀보니 유행처럼 섬마다 선호하는 비석들이 다르다. 어떤 섬은 유난히 선정비나 공덕비가 많고 어떤 섬은 열녀비가 많다. 또 어떤 섬은 효자비가 많다. 비석은 그 섬이 중요시 하는 가치의 표현이거나 권력 관계의 지표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을 건너자 길옆에 두미 개척 60주년 비가 낡아간다. 욕지도에도 개척 기념비가 있었다. 이 근방 섬사람들의 중심 가치는 개척 정신인 듯하다.

작년에 칠십, 올해 육십, 할머니는 나이를 거꾸로 드시고

하천 옆 양지 녘에 할머니 한 분이 칼을 들고 그물 손질을 한다. 할머니는 로프에 붙은 그물을 긁어낸다. 찢겨진 그물을 뜯어낸 뒤 로프를 재활용하기 위해서다.
"어디서 왔소?" "아주 멀리서 왔습니다."

"구경하러 왔습니까? 친척집에 왔습니까?"

 "그냥 구경삼아 왔어요. 할머니."

 "우리 집에도 오라고 하고 싶지만 메느리도 있고 아들도 있으니 내 맘대로 못합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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