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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가파른 절벽, 숙명 같은 섬

강제윤 시인 - 울릉도, 죽도기행(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9.05 08:35
  • 수정 2015.11.1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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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침 출항할 때까지만 해도 파도는 잔잔했고 바람은 미풍이었다. 포구에 나간 여자는 고기잡이 떠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돛을 달고 나갔던 어선들이 하나둘 서둘러 귀항했지만 끝내 남편의 배는 보이지 않았다. 사나운 폭풍이 섬을 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걱정과 불안에 여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녘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 남편이 나타났다. 남편은 자신이 죽도의 굴에 있다고 이야기 했다. 꿈을 깨고 난 뒤에도 현실처럼 생생해 아내는 몸서리를 쳤다.

연 이틀 폭풍이 불다 바다는 다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잔잔해졌다. 하지만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부서진 배의 파편들만 떠밀려왔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다. 여자는 배의 파편들을 주워 모았다. 그날 밤 꿈에 다시 남편이 나타났다. 죽도에 있으니 빨리 와서 구해달라고 애타게 호소했다. 역시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 아내는 관청을 찾아가서 애원했다. 수색대가 죽도로 출발했다. 배가 죽도 해안을 한 바퀴 도는데 어떤 굴에서 살려달라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굴의 바위 끝에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여자의 남편이었다. 수색대는 어부를 구해냈다. 이 후 어부가 매달려 있던 굴은 자비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30년대 울릉도와 죽도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전한다. 생사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드며 사는 섬에서 삶이란 그대로 신화가 되기 쉽상이다. 이 믿기지 않는 실화도 그래서 신화가 되었다. 실화와 신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현실을 떠난 신화 따위란 어디에도 없다. 어떠한 신화도 현실의 반영이다. 신화가 현실의 상징이며 은유인 것은 그 때문이다.

어디 섬뿐이랴. 삶은 온통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신화와 전설, 설화 어느 하나 삶의 상징 아닌 것이 없다. 삶은 곳곳이 풀어야할 암호 투성이다. 성하신당의 설화를 뒤로 하고 나그네는 도동항에서 죽도행 유람선에 오른다. 한 가구가 사는 죽도에 정기여객선은 없다. 유람객들을 모아 하루 한 두 차례 배가 뜨는 것이 고작이다.

독도에 대한 관심으로 오늘 독도행 유람선은 미어터질 지경이지만 죽도행 배에는 사람이 드물다. 죽도는 울릉도 동북쪽 3.5킬로미터 지점에 불쑥 솟아 있다.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 뱃길이다. 짧은 뱃길이지만 낯선 섬으로 가는 선실은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죽도 선착장에서 마을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절벽이다. 지금이야 나선형 계단이 설치되어 쉽게 오르지만 예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저 아찔한 절벽을 오르내렸을까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섬은 빠삐용이 갇혀 있던 감옥처럼 천연의 요새다. 섬을 오르내리는 일이 생사를 넘나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섬은 절벽을 오르면 거짓말처럼 평지다. 섬은 입구부터 곳곳이 시누대밭이다. 죽도란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대나무들 덕분이다. 섬 주민이 사는 집 입구에는 관광객들의 출입을 금하는 금줄이 걸려 있다. 섬의 중앙에는 너른 밭이 있고 밭의 흙속에는 더덕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 섬에 살지만 죽도 주민은 바다가 아니라 땅에 기대고 사는 것이다.

섬은 온통 방풍림에 둘려 쌓여 거센 바람에도 안전하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산책길을 걸으니 찌는 듯이 덥다. 한참을 그렇게 찜통 속을 걷다 문득 어느 언덕에 서니 서늘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은 울릉도 본섬에서 건너온 것이다. 동해바다를 지나며 눅눅하고 후끈해진 바람이 성인봉을 비롯한 높고 깊은 산들을 통과해 오면서 청량해 진 것이다. 바람의 언덕에서는 관음도와 삼선암의 풍경이 선계처럼 펼쳐진다. 비경은 대게 그에 값하는 신화나 전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삼선암 또한 예외는 아니다.

아득한 옛날 동해 바다의 경치에 매혹된 세 선녀가 있었다. 선녀들은 자주 울릉도 부근 바다에 내려와 물놀이를 즐기다 승천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녀들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장수와 용의 호위 속에 울릉도 앞 바다로 내려와 노닐었다. 물놀이에 열중해 있던 두 언니 선녀는 문득 막내 선녀가 호위 장수와 뒤엉켜 정을 나누는 것을 목격했다. 언니 선녀는 옥황상제에게 들키기 전에 서둘러 하늘로 돌아가자고 했다.

하지만 막내 선녀의 옷이 사라지고 없었다. 막내를 버려두고 둘이만 돌아갈 수가 없어 함께 옷을 찾던 언니 선녀들도 천계로 승천할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전능한 옥황상제가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묵묵히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옥황상제는 분노와 질투심에 사로잡혀 세 선녀와 장수 모두를 바위로 만들어 버렸다.

삼선암과 장수바위가 생긴 내력이다. 천상의 주인인 옥황상제마저도 어쩌지 못 하는 것이 질투심인가! 대체로 자연물에 얽힌 전설이란 사람 세계의 은유와 상징이다. 삼선암과 장수바위의 설화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 섬은 도망자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그들 도망자들 속에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의 도피자들도 있었을 터다. 설화는 신분 사회의 비극적 연애담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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