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기획취재> ‘한 장수가 공을 이루려면 만 사람의 뼈가 마른다!

강제윤 시인 - 통영 한산도 기행(3)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4.01.16 10:40
  • 수정 2015.11.10 22:42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른 아침 조계종(趙繼宗)이 현풍 수군 손풍련에게 소송을 당한 결과 마주 대면하고 공술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갔다.'(1596.2.20)
'날이 어두워질 무렵 영등 조계종이 소실을 데리고 술을 들고 와서 마시기를 권했다.' (1596.2.20)
'밤 9시가 지나서 영등 조계종이 그의 딸을 데리고 술병을 들고 왔다고 하는데 만나지 않았다. 11시가 넘어서 돌아갔다.'(1596.3.23)

전란 중에도 조정은 여전히 부패한 자들의 잔치판이었다. 이순신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듯하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다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 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둘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1597.5.21)

한산해전 승리는 거북선이 아니라 판옥선의 힘
한산도는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 장군(1545-1598)이었는데 경상·전라·충청도 3도의 수군 총사령관이었다. 1593년(선조 26) 8월 임진왜란 중에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2월, 파직될 때까지 한산도에 주둔했다. 7년 전쟁 중 3년 8개월을 한산도에 머물렀으니 섬은 가히 장군의 섬이라 이를만하다.

현재 섬에는 제승당, 영당, 충무사, 수루, 한산정 등의 건물이 있지만 이순신 장군 당시에 지은 것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 진영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폐허가 돼버렸다. 왜군의 수중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조선 수군이 퇴각하면서 소개시켜버린 때문이다. 영조 15년(1739년)에 이르러서야 107대 조경 통제사가 운주당 옛터에 다시 건물을 세우고 제승당(制勝堂)이라 이름 지었다. 운주당이란 이순신 장군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던 이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진(陣)을 친 이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참모들과 작전 회의를 했다 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머무는 동안에는 큰 전투가 없었다. 세력균형 상태가 지속됐다. 당시 한산도에는 판옥선 150여척이 있었고 1만5천-2만명 정도의 수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승당의 수루에서는 한산도 앞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을 환히 다 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배들에서는 한산도 진영을 엿볼 수가 없다. 해갑도란 섬이 가로막고 있어서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

이순신 장군이 시름하던 수루(戌樓)는 정자만 하나 딸랑 지어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난중일기에 수루에 도배를 했고 잠을 잤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망루뿐만 아니라 숙직할 수 있는 방도 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루는 한산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군사기지 어디에나 있던 망루다. 그래서 과거에는 군에 가는 것을 수자리 살러간다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한산도가(閑山島歌)>는 1592년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지학 전문가이자 <한산도가>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이종학 독도박물관장은 “장군이 1597년 보성 열선루에서 한산도를 바라보며 지은 한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왜군의 보급창고가 될 곡창지대 호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조선 수군은 경상도 바다에서 왜군을 막아내야 했다. 호남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는데 한산도는 적지였다. 초대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을 여수가 아니라 통영의 한산도에 두게 된 전략적 이유다.

선조 25년(1592년)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등과 연합해 왜군에 맞선다. 조선수군이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의 전함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군을 유인할 전략을 세운다. 조선의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하도록 했다. 이에 적선들이 쫓아 나오자 조선 수군은 견내량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군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에 도착할 즈음 갑자기 학익진을 펼치고 대포를 쏘아대며 왜적을 초토화 시켜버렸다.

한산도 전투에서 왜군 대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였다. 육전에서 그는 3천 병사로 용인을 수비하던 중 전라감사 이광이 이끄는 조선군 5만 공격을 받지만, 야간에 기습공격 하여 패주시킨 맹장이었다. 또 정유재란 때인 1597년 7월에는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역습해 섬멸시켰던 자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